ADVERTISEMENT

(1)운명의 그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양태조·김경욱·주변섭일 기자 공동취재】
광복 25주년. 민족분열과 국토양단으로 한반도를 비극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던 38선도 세월이 흘러 25년. 하나의 위도 표시에 불과했던 38선. 어처구니없게도 한국은 남·북으로 두 동강이 나고 6·25 동란의 도화선이 되었던 38선은 망각 속에서 그 흔적조차 희미해져가고 있다. 그러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는 38선의 비극. 그 통분함과 그 억울함을 하나하나 찾아 더듬어본다.
38선-. 그것은 너무도 어처구니없게 그어진 선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쇠사슬에서 해방된 환희의 감격도 채 사라지기 전에 북쪽에 진군한 소련군과 남쪽에 진주한 미군은 38선에 경비초소를 각각 세우고 단일 민족을 두 동강이로 갈라놓았다·
38선이 미군과 소련군의 군사분계선이라는 것이다. 당초 이 군사분계선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만을 위해 설치되었었다.
38선 경계는 그 지역 지역에 따라 경계하기 쉬운 것으로 택해졌으며 길목마다 38선 경계초소가 생긴 것도 날짜로 보아 각각 달랐다.
강원도 춘성군 북산면 추전리에는 9월 23일에 38선 경계초소가 소련군에 의해 설치되었다.
이날아침 북쪽에서 완전 무장한 소련군 5, 6명이 탄 「지프」3대가 작은 앞 냇가 북쪽에 도착, 초소를 만들고 경계를 시작했으며 며칠 뒤 남쪽에서도 미군이 「지프」를 타고 와서 통행을 막기 시작했다.
이 길목은 춘천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길로 매일 금강산행 「버스」가 다녔는데 38선 초소가 생기자 「버스」도 끊어지고 윗마을과 아랫마을의 통행도 차단되는 등 민족 분열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멋모르는 동네주민들은 초소가 생겨도 무서워하지 않고 북쪽동네로 놀러갔다가 소련군에 붙잡혀 하룻밤을 새우는 등 고생을 했다.<지유성씨(65)의 말>
경기도 포천군 영중면 양문리의 경우는 9월 초순 소련군이 마을 앞을 지나 남으로 내려갔다. 양문리 마을이 38선 이북에 들어간 거라고 주민들은 걱정했는데 며칠 뒤 미군이 진주, 소련군이 마을에서 북쪽으로 2km나 후퇴하여 38선 경계 초소를 만들었다.<박순만씨(61)의 말>
강원도 인제군 남면 부평리에는 10월 중순 소련군이 말을 타고 진주, 고성 원산으로 가는 나루터에 초소를 만들었다.
휴전 후 이곳에는 38교가 세워졌으나 실제로 38선은 남쪽 2백m지점인데 이곳이 38경계가 되었다.<박해순씨(47)의 말>
춘천에서 화천으로 가는 모진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38선은 이곳에서 북쪽 1백m지점이었으나 10월 중순 미군이 남쪽으로부터 진주, 강기슭에 「퀀시트」를 세우고 지키기 시작했다.
동해안의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기사문리 에서는 다른 지역에 비해 각박했다.
8월 하순 소련군 1개 소대가 달려 들어와 실개천을 사이에 두고 풍치산 언덕에 흙 굴을 파고 「토치카」를 구축, 북으로 가는 길목을 끊고 통행을 완전히 차단하고 말았다. 이 길목은 원산 속초 등지로 가는 동해안의 유일한 길인데 소련군 때문에 꼼짝을 못했다. <함학종씨(63)의 말
이렇게 38선은 진주군에 의해 제멋대로 구축되고 차단되었다.
처음 군사분계선으로 결정될 때 이 선은 분명히 임시적인 것에 불과했다.
미군은 9월 9일에야 「하지」중장 지휘아래 7만 2천명이 인천에 상륙했다.
한 달이나 앞서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개성시 등 38선 이남까지 남하, 각종 물자를 약탈하고 미군이 진주한 후 후퇴했다. 38선 경계를 위해 진주하는 미군과 소련군을 마을사람들은 해방군이라고 태극기틀 흔들고 환영했으며 곳곳에서 감자를 삶아 환영 잔치를 벌인 곳도 많았다. 38선 경계초소가 생기던 비극의 그 날을 우리는 참으로 통분함과 억울함도 모르고 맞이한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