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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워치] '이분법 미국對 다원화 유럽' 세계관 충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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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미국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이 '문명의 충돌'을 발표한 것은 1993년이다. 헌팅턴은 종교를 구심점으로 세계 문명을 7개 문명들로 나누고 세계사는 국가.이데올로기간 대립을 끝내고 문명간 대립 단계에 들어섰다고 주장했다.

헌팅턴은 서구 기독교.이슬람교.유교를 3대 문명으로 꼽으면서 이들 사이에 앞으로 여러 세대 동안 '현실적이면서도 기본적인 차이'가 존재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9.11 테러가 발생했을 때 많은 사람은 헌팅턴이 말한 문명의 충돌이 시작됐다고 생각했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도 같은 관점에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이라크 전쟁을 둘러싼 국제사회의 여론을 보면 헌팅턴의 견해를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15~16일 세계 60개 도시에서 1천만명이 참가한 반전 시위는 사상 유례가 없는 사건이었다. 거기에 문명간 차이는 존재하지 않았고, 전쟁 아닌 평화를 원하는 인류 공통의 염원만 있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 미국과 유럽의 분열이다. 헌팅턴에 따르면 미국과 유럽은 같은 서구 기독교 문명에 속하며 같은 가치를 공유한다. 당연히 같은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런데 둘은 서로 대립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문명의 내부 충돌이다.

이라크 전쟁을 놓고 유럽은 둘로 갈라졌다. 영국.이탈리아.스페인이 찬성에 앞장서고 덴마크.포르투갈.네덜란드.아일랜드.옛 동유럽 국가들이 동조하고 있다.

반대는 프랑스.독일을 비롯해 벨기에.그리스.핀란드.스웨덴.오스트리아가 따르고 있다. 나라 숫자에선 찬성이 앞서지만 유럽 전체 여론으로 보면 반대가 훨씬 우세하다.

찬성 국가들 중 가장 적극적인 영국조차 반대 52%, 찬성 29%로 반대가 압도적이다. 영국 국민의 55%는 토니 블레어 총리에 불만이며, 여당인 노동당 지지율도 39%로 떨어졌다.

반대의 선봉에 선 프랑스와 독일은 유럽의 중심이다. 프랑스는 샤를 드골 이래 미국 견제를 도맡아 왔다. 소련의 침공을 막기 위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창설은 인정했지만 나토가 유럽에 대한 미국의 패권 유지의 수단이라는 기본 인식을 지금도 바꾸지 않고 있다.

60년대 영국이 유럽공동체(EC) 가입을 신청하자 드골은 '미국이 보낸 트로이 목마'라며 두번이나 거부했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동유럽 국가들이 미국을 지지하고 나서자 유럽연합(EU) 가입에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독일의 변신은 놀랍다. 독일은 어떤 전쟁에도 반대라는 초강경 입장이다. 맹방이라고 믿었던 독일의 '배신'에 미국은 당황하고 있다. 이달 초 뮌헨에서 열린 연례 안보회의에서 도널드 럼즈펠드 미국 국방장관은 독일의 외교정책이 쿠바와 리비아의 그것과 같다면서 프랑스와 독일을 '낡은 유럽'이라고 싸잡아 비난했다. 미국은 7만명에 달하는 주독 미군을 미국에 우호적인 '새로운 유럽' 동유럽 국가들로 이동.배치하는 계획을 검토 중이다.

헌팅턴에 맞서 '문명의 공존'을 쓴 독일 정치학자 하랄트 뮐러는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이 미국사에 상존하는 우리와 그들, 빛과 어둠이라는 '마니교(敎)식 정치학'이라고 비판한다. 세계는 헌팅턴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며, 복잡한 세계엔 복잡한 세계관이 필요하다고 뮐러는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이라크 전쟁을 둘러싼 미국과 유럽의 대립은 미국식 단순한 세계관과 유럽식 복잡한 세계관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정우량 국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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