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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좌 36년…포르투갈 독재자 「살라자르」의 생애와 일화(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안토니오·데·올리베이라·살라자르」-서구에서 가장 뒤진 『후진국』에서 사상 최장의 집권을 자랑하던 포르투갈의 이 독재자는 27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 독재자들은 흔히 많은 일화를 남긴다. 「살라자르」 역시 마찬가지. 유럽에서 가장 가난하고 폐결핵 환자 수도 제일 많은 「파시스크」 포르투갈의 현대사도 인간 「살라자르」의 생애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살라자르」는 1889년4월28일 「베이라알타」주의 한촌 「비미이에로」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소농인 아버지 「안토니오·데·올리베이라」와 독실한 가톨릭 신도인 어머니 「마리아·도·살라자르」의 다섯째 아들이었다.
유년 시대의 「살라자르」는 고독하고 우울한 「마마·보이」, 혼자서 들판을 쏘다니며 다른 사람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샌님 「타입」이었다.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을 잠시도 떼어놓으려 하지 않는 「극성 마님」이었다고 한다.
「살라자르」도 훗날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말단 서기도 못 했을 거야』 라고 술회했다고 한다.
마을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1살 되던 해 그는 비로소 어머니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었다. 신부가 되려고 비세우 신학교에 입학했던 것. 그러나 졸업할 임시엔 신부가 될 생각을 버리고 그 대신 코임브라 대학 경제학과에 입학,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그해 포루투갈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마누엘」왕조를 전복하고 공화정을 선포했다.
학원은 왕당파와 공화파의 격렬한 대결장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살라자르」만은 여기에 휩쓸리지 않고 도서관에 들어앉아 오로지 책만 읽었다고 한다. 그의 눈엔 공화정이란 한낱 우매한 폭도들의 난동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살라자르」는 경제학과 재정학 박사 학위를 얻은 후 1914년 모교의 교수로 일자리를 잡았다. 「살라자르」교수는 『얼음 같은 사람』 이란 평을 들었다. 그렇게 차갑고 엄격했던 모양이다. 어쩌다가 한 학생이 악수를 청하면 그건 받지 않고 상대방의 얼굴을 뚫어져라 노려보는 통에 감히 얼씬을 못했다고 한다. 젊은 나이에도 「술·담배·여자·노래」를 모르는 도덕 군자(?)였다. 교회와 질서와 금연, 그에겐 이것이 전부였다. 2년 뒤 「살라자르」는 의회에 진출, 정치인이 됐다.
주위 사람들의 권고로 가톨릭 후보로서 출마해 당선 된 것이다. 그 당시 가톨릭 후보로 당선된 사람은 3명뿐이었다.
그러나 『공화파』와 더불어 국사를 논의할 수 없어』 꼭 한번 등원하고는 집어치웠다.
1926년 「마뉴엘·다·코스타」장군의 군사 쿠데타로 『혼란의 공화정』은 끝장이 나고 말았다. 그 동안 포르투갈엔 24차례의 정변, 1백50건의 파업, 44번의 정권 교체가 일어났다. 걸핏하면 폭탄이 터지고 반란과 데모가 일어나고 파업이 생기는 통에 「살라자르」는 민주주의에 환멸을 느껴 철저하게 증오하게 되었다.
군부는 보수적 경제 전문가로 이름난 그를 재정상에 임명했다. 「살라자르」는 경제 파탄을 극복하기 위해 극단적인 긴축 정책을 입안했으나 국민의 반발을 우려해 군부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화가 난 「살라자르」는 장관 자리를 팽개치고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2년 후 재정이 문자 그대로 파국에 이르자 군부는 다시금 「살라자르」 교수를 불러 들였다.
그러나 이번엔 조건을 제시했다. 입각은 하되 전권을 부여하라는 요구였다. 재정상으로서의 그는 자기의 긴축 정책을 강행, 통화를 안정시키고 인플레를 억제했다.
그 때문에 국민들은 흑심한 내핍 생활을 감내 해야 했다.
식당에선 소위 「살라자르」 생선 요리』란 걸 팔았다. 생선 두어 쪽에 감자 몇 개를 넣고 끓인 맛없는 싸구려 음식을 비꼬아 말 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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