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생에의 발돋움|한국 화단|상반기의 화단 박용숙 <미술 평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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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4월에 열린 현대 프랑스 명화전을 필두로 하여 70년대를 맞는 한국 미술은 무언가 갱생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듯 했다. 그것은 그 뒤를 이어 마구 쏟아지기 시작한 각종 개인전이나 「그룹」전을 제쳐놓고서라도 크게는 현대 국립 미술관 전과 한국 미술 대상전이 꼬리를 물고 연이어 열렸다는 사실로써도 능히 일반인의 주목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기대했던 대로 한국 미술은 갱생의 기미를 보였는가. 이것이 우리들의 쟁점이 될 것이다.
대체 한국 미술에 있어서 갱생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우리들의 실정으로서는 적어도 화가들이 등져온 생활 (현실)을 자기 작업으로서 정립 (테제)하는 최선의 노력을 뜻한다.
어떤 경향의 예술이든지-가령 그것은 생활을 떠나 보려는 추상화일지라도 그 작업의 동기는 결국 생활에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우리들의 논지는 한결 자명해진다. 오늘날 한국미술의 비극적인 혼란은 서구인의 오랜 생활에서 자란 미술을, 생활은 두고 미술만을 뎅겅 따다가 이를 이식해 보려는데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어리석음은 그들의 생활은 두고 제도만을 뎅겅하게 따온 우리들의 민주주의 제도 장치와 같이 잘되어야 기형이고 못되면 그것은 악순환의 연속인 것이다. 그러므로 제도에 잘못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제도에 맞을만한 생활이 우리들에게 없었던 것처럼, 서양화의 다양한 유파가 우리들에게 먼저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발목이 잡혀 있는 생생한 우리들의 생활이 요구하는 혹은 거부하는 그림이 진실로 우리에겐 필요한 것이다. 바로 생활의 정립이 한국 미술의 갱생을 위한 첫 과제라는 것은 그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들의 관심은 새 경향의 서양 미술이 어떻게 우리 눈앞에서 번쩍거리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생활에 대하여 누가 어떤 모습으로 관심을 표하는가에 있다. 그것이 하나의 양식, 즉 「리글」의 표현대로 『예술 의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남는 문제는 우리들의 특수한 생활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에 있다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지난 생활의 모습을 이당 회고전에서 볼 수 있다. 그 리듬의 연속을 한국화전이나 신수회전에서 기대함직도 했다. 그러나 이른바 『내림 그림』으로서의 이당의 그림 화석화한 그림이며 나머지 두 「그룹」은 물론, 비교적 솔직함 때문에 호감을 주는 오승우씨의 경우도 움직이지 않는 그림이 되어 버렸다. 그것은 그들이 우리들의 동양적 생활 패턴에 흐르고 있는 어떤 특수한 리듬의 변화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주기도 한다.
만일 지난날 우리들의 미학의 뒷받침이 되었던 주자학에서 실학에 이르는 변화에 조금이라도 이해가 있었다면 그래도 조금은 체계적인 면모를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고정시키고 보면 당연히 우리들은 근자에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토속의 등장에 눈을 돌려야되는데, 그것은 최근의 한국 미술이 어쩌면 자기 생활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로 현대 미술에 있어서 그러한 토속의 등장은 「에콜·드·파리」시대의 「프리미티브」를 구체화하는 경향으로서 그것은 서양이 스스로 잃었던 참다운 자기네의 생활을 회복하기 위한 작업의 한 과정임을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한 움직임은 이른바 「레비·스트로스」를 대표로 하는 구조 인류학의 영향이며, 토속 속에서 현대인의 소외된 정신을 구제할 수 있는 구조를 발견하는데 있는 것이다. 아마 남관씨 (개인전)나 이성자씨, 전성우씨 (어쩌면 비함전까지도)는 이런 흐름 속에서 하나의 자기「모티브」를 갖는 것이라고 추단된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 세력의 영향에서 받는 모티브와는 달리 순수한 내적 동기로서 토속을 끌어들이는 화가들, 가령 김기창 송수남 송영방 등 제씨의 그림은 단순히 「프리미티브」라는 입장보다도 하나의 「퍼로키얼리즘」의 무드를 가지는 문화적 「내셔널리즘」에 「인텐시티」가 있는 것이 보인다.
이런 관점을 계속해서 조각에까지 끌고 간다면, 우리들이 상반기의 조각에 대해서 이야기 할 것은 별로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근자에 「AG 그룹」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미니멀」의 경향이 우리를 당황케 할 정도로 「클로스업」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쩌면 지난날 어느 한때를 휩쓸었던「앙포르멜」의 추태가 다시금 재래하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되는 것은 그들의 작업이 생산적이 아니라 다분히 도식적이며 조립적인 인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장래는 이제부터이며 따라서 우리는 이후의 사태 추이를 조심스럽게 주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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