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해방에서 환국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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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일본영사관 경찰서의 지급전보로 상해임시정부에서 모종의 중대계획을 하고있다는 비밀정보를 받은 조선총독부와 일본내무성에서는 긴급회의를 한 결과 우선 종로서 고동계주임으로 사상경찰의 권위인 미와(삼륜)정부를 상해까지 수행케하는 한편, 그러고도 미심해서 동지나해방면에 있던 군함을 상해까지 파견하기로 하였었다.
그에 따라 l927년5월30일 아침 영친왕 일행이 탄 하꼬네마루(적근환)가 상해부두에 닿자, 유외함대 사령관 아라끼(황성)소장과 야다(시전) 총영사가 마중나와서 『상해에 상륙하심은 위험하오니, 오늘밤은 군함에서 주무셔야 되겠읍니다.』라고 하여 즉시 수뇌정으로 야구모(팔운)로 옮겨 탈것을 권고하였다.
그리하여 영친왕 부처는 상해는 구경도 못하고 군함에서 하룻밤을 지냈으며, 그에따라 영친왕이 상해에 상륙하면 납치하려던 임시정부의 계획도 자연 수포로 돌아가고 만 것이었다. 일본군함 야구모에서 하룻밤을 지낸 영친왕은 그 이튿날 아침 상륙은 하지않더라도 란치를 타고 황포강을 치켜 올라가서 멀리 연안의 풍경이나마 보고 싶었으나 『대안에서 총을 쏘면 위험합니다』라는 말에 그것마저 중지하고 그날오후에 다시 하꼬네마루로 갈아탈 때까지 그저 가만히 군함속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수원은 시노다(소전)이 왕직차관을 비롯하여 시종무관 사또(좌등)중좌, 김응선대좌, 그리고 전의와 시녀들을 합해서 전부 7명이었는데 그 중의 좌등중좌는 신변보호와 함께 감시의 중책을 맡은 사람이었다.
영친왕 일행이 탄 하꼬네마루는 그날 하오 3시에 상해를 출발하여 싱가포르로 향했는데 그날로부터 영친왕의 머리속에는 『상해에는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임시정부가 있다』는 생각이 더욱 뚜렷하게 남아있게 되었으며, 모처럼 상해까지 와서 정작 상해구경을 하지 못한 것이 섭섭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지나간 날 동경에서 만날 뻔했다가 만나지 못한 여운형이나 상해임시정부의 요인들의 생각이 자꾸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어찌 하는 수 가 없었다. 그뿐 아니라 일본을 떠나올 때 한창수 이왕직장관이나 함께 데리고 온 시종무관은 『임시정부 사람은 위험하니 절대로 만나지 말라』고 하였지만, 암만 생각해도 그들이 자기에게 해를 끼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상해를 싱겁게 통과하고 난 뒤에는 이 핑계 저 핑계로 외부사람과의 접촉을 못하게 하는 측근자들이 도리어 밉기까지 하였다.
하꼬네마루가 상해를 떠나서 싱가포르로 향하는 도중에 5월이 끝나고 6월이 되었다. 세계의 삼대야경의 하나인 향항의 밤을 마음껏 즐기고 있을 때, 시노다 이왕직차관이 무엇인가 자꾸 분개를 하고 있었다. 자세히 이야기를 듣고보니 향항의 영국 총독이 경의를 표하러 오지않는다는 것이었으나 처음부터 개인자격으로 여행을 떠난 영친왕이므로 그런 일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리하여 도리어 시노다차관을 달래기까기 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일본을 떠나올 때 고오배(신호)에 있는 뉘하임이라는 독일인의 과자상이 준 카나리아의 새장앞에서 비전하가 무엇인가 심각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왜 그러오?』
하고 영친왕이 물으니 방자비는 『카나리아가 모이를 먹지도 않고 울지도 않아요.』
독일인 과자상이 카나리아를 헌상했을 때는 자웅을 따로따로 새장에 넣었었는데, 방자비가 그것을 한 장속에 넣었던 것이다.
『카나리아는 따로 따로 있지않으면 울지 않는답니다.』라고 시노다차관이 말씀하니, 방자비는 『울지않아도 좋아요. 따로 따로 있으면서 서로 건너다만 보는 것이 너무 가엾어서….』라고 말하면서 동경서와는 판이하게 1등 선객과 더불어 때로는 보이들을 상대하여 희희낙락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 영친왕과 자기야말로 새장에 든 카나리아가 아닌가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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