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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20년 6·25|전쟁미망인·고아들의 오늘을 찾아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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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50년6월25일부터 53년7월27일까지 3년 1개월동안 계속된 전쟁에서 남한에서만 백만의 군인과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죽은 사람들의 희생은 죽는 날로 끝났으나 살아남은 사람들의 상처는 그날부터 시작이었다. 전쟁난지 20년-그 당시 30만으로 헤아려지던 전쟁미망인과 10만 전쟁고아들이 상처를 딛고 이룩한 오늘을 찾아본다.
격전과 격전, 불붙는 격전의 연속이었다. 일선에서 전사한 남편, 피난길에서 폭사한 남편, 그리고 납북돼 가는 남편들로 미망인은 날로 늘고 피난길마다 부모 손을 놓친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가득 차 있었다.
53년 피난지 부산에서 조직된 중앙부인회는 전쟁미망인들이 서로 손을 잡은 수많은 모임중의 하나였다. 미망인이 되어 피난길에서 만난 호수돈여고의 네 동창생, 송효선·차윤신·이정화·최영식여사들은 40여명의 회원을 모아 자봉틀 두 대를 굴리며 남편없이 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하려고 동분서주했다. 이들은 하루종일 옷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곤 했는데, 기름장수, 빈대떡장수, 군인빨래등으로 끼니를 이어가는 다른 미망인들에 비하면 훨씬 안정된 벌이라고 할 수 있었다.
피난지에서의 고생은 그래도 소용돌이에 휩싸여 흘러갔다. 3년의 전쟁이 끝나고 부서진 옛집에 돌아갔을 때, 대부분의 미망인들은 남편은 이제 영원히 타계했다는 것을, 그리고 전쟁은 끝났으나 생존을 위한 전쟁은 끝없이 계속 될 것이라는 것을 찬물 끼얹듯 깨달을 수 있었다.
『사흘을 꼬박 물한 모금 먹지못하고 울었다. 남편의 전사통보를 받은 후 처음 그렇게 울었었다』고 손정자여사(42·서울신대방동)는 피난길에서 돌아오던 날을 회상한다. 연희대학에 다니다가 지원병으로 군에 갔던 남편은 유복녀 하나를 남기고 갔다.
원호처가 집계한 전몰군경미망인 회원은 2만7천4백25명. 이들은 월 2천원의 연금을 받고 있을 뿐으로 장성한 자녀의 도움없이는 상당한 생계의 위협을 받고 있다. 이들 군경미망인이나 그 자녀들에게 전체 고용인의 3∼8%의 문호를 개방하라는 고용법이 공공기업체에 하달되어있으나 현재 직업을 가진 미망인은 1할도 안되는 3천1백64명이 대부분 용원등으로 일하고 있을 뿐이다.
지난 20년동안 미망인들은 교육 적령기의 자녀들을 위해 무슨 일이건 미친 듯 매달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세월이 가면서 자녀들은 차차 성장했고 수많은 단체들은 수많은 어머니상을 미망인 어머니들에게 주었다. 50대, 60대의 초로에 들어 자녀와 사회로부터 고생스럽던 세월을 보상받기 시작한 어머니들은 비로소 고독을 맛보는 여유를 갖게되었다.
『세 딸이 모두 시집을 가버리니 영감생각이 난다. 우리 영감은 피난길에서 돌아갔는데 시신을 덮을 헝겊 한 조각이 없어 거적을 덮어 모셨었다. 그게 가슴에 걸려 내가 죽으면 어떻게 영감을 대하나 걱정이 된다.』 김재현(66·회기동)할머니의 말이다.
남편의 죽음을 확인할 길 없는 납북미망인들은 살아서 다시 만날 날을 꿈꾸고 어느덧 희망을 갖기도 한다. 중앙중학교 교사이던 남편 엄진기씨를 이북에 뺏긴 최영식씨(60·중앙부인회 총무)는 『꼭 만날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1950년 12월, 포화속에서 부모를 잃고 울부짖는 10만 고아중 9백7명이 10여대의 비행기로 제주도에 공수되었는데 이것은 정부가 개입된 유일한 고아피난대책이었다. 이들을 인솔해서 제주도에 간이래 인연을 계속해온 황온순여사(한국보육원장)는 『전쟁고아들은 우수했으며 모두 좋은 시민들로 성장했다』고 말하고있다.
좋은 가정에서 부모들의 사랑속에 자라다가 하루아침에 고아가 된 아이들이라 집에 가고싶다고 몸부림치는 모습은 차마 볼 수가 없었다.
57년 서울로 옮겨온 4백70명의 고아들중 3백명은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11명은 서울대·외대·중앙대등을 졸업했다.
이들 중에는 교향악단의 연주자도 있고 공무원도 있으며 성공한 실업가도 있다. 대부분 결혼해서 안정된 가정을 가지고있는 이들이 한결같이 원하는 것은 『전쟁고아였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다는 것』이다.
33세의 한 가장은 이렇게 말했다. 『물론 아내는 내가 고아원에서 자란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처가식구들이 모두 알게되고 나를 그런 눈으로 본다면 그 견디기 힘들던 어린날의 상처를 나는 일생동안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대부분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고아원을 떠나게 되는 소년·소녀들은 사회에 나가면 원장어머니에게 고향의 노모에게 편지를 쓰듯 사연을 보내고 함께 자라던 원생들끼리는 형제를 그리워하듯 서로 찾아다닌다. 서로서로 취직도 알선해 주고 만나는 사이에 사랑이 싹터 결혼하는 커플들도 있다.
일반적으로 공부가 뒤떨어지고 반항심이 많은 청소년시절을 보냈던 전쟁고아들이 진정으로 감사를 느끼는 것은 자신의 아이를 낳아 부모가 되었을 때라고 황여사는 말한다. 대구에 살고 있는 김종수씨가 원장어머니에게 보내온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저 자신이 두 아들을 기르고있으니 그렇게 고생스럽던 시절을 지나 제가 살아왔다는 일이 처음으로 보람있게 느껴집니다. 다시는 부모없이 자라는 슬픔을 제 아들들에게 주지 않기위해 신에게 빌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한 개인의 소우주는 결국 가정이며 이 가정을 대의 명분없이 파괴하고 지나간 전쟁에 대한 의식을 20년전의 전쟁고아, 그리고 미망인들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다시 없기를 바라며 되돌아 보고 있다. <장명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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