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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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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영친왕이 항상 마음속으로 송구하게 생각하는 분이 하나있었으니 그분이 즉 의친왕이다.
의친왕(전 이강 공)은 고종황제의 제2왕자이므로 만일 순서대로 한다면 그분이 왕위계승자로 왕세자가 되어야 했을 것을 한 다리 건너서 끝의 아우인 자기가 큰 형님 앞으로 왕위계승자가 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는 때문이었다. 더구나 의친왕은 소위 선풍 도골로 총명한 재질을 타고났건만 일생을 풍류와 향락만으로 보냈으므로 세상에서『의친왕이 그같이 방탕한 생활을 하게된 것은 영친왕이 순종 앞으로 왕세자가 되자, 자기가 되지 못한 데에 불만을 품고서 전생애롤 향락으로 일관하게 된 것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던 만큼 영친왕도 늘 그 점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러나 영친왕이 주 세자로 책봉 된지 미구해서 한일합병으로 나라와 왕실이 다함께 망하였으므로 그런 일은 다 지나간 날의 한낱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게 되었건만 의친왕의 방탕은 조금도 개선되지를 않았으니 아마 그것은「망국의 통한」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의친왕은 인물이 동탕한 이우 공의 생부인 만큼 구 왕족으로는 제일 잘 생긴 사람이었으며 꼭 그 때문은 아니었지만 한국과 일본에 걸쳐 무려 30수명의 자녀를 둔 것도 그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1929년9월10일의 일이었다. 이날은 총독부에서 주최하는 조선박람회가 열리는 날로서 경회루에서는 사이또오 총독 이하 관민 수천명이 모여서. 성대한 개회식을 하게 되었었다.
일본으로부터는 특히 황족을 대표해서 강인노미야가 왔는데 이 강인노미야는 영국 콘노드 전하와 함께 세계 왕실 중에서도 가장 잘 생긴 사람으로 유명하였다.
당시 필자는 일개의 신문기자로 참석하였지만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경회루에는 소위 입추의 여지가 없을 만큼 사람이 빽빽하게 들어선 가운데 멀리 단상을 바라보니 사이또오 총독을 중심으로 왼편에는 의친왕(당시는 이강 공 전하), 오른편엔 강인노미야가 앉아있었는데 의친왕은 어둠침침한 중에서도 달덩이 같이 얼굴이 환하고 기품이 있어 보이는 반면에 강인노미야는 얼굴의 윤곽만은 단정하게 잘 생겼으나 까무잡잡하고 빈약한 것이 의친왕과는 비교가 되지않을이만큼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 의자에 앉아 있을 때에는 그런 대로 괜찮았으나 개회식이 파해서 일어설 때의 광경이 가관이었다. 그것은 강인노미야의 다리가 짧아서 앉아있을 때에는 체격이 늠름하게 보이던 것이 의자에서 일어서니까 갑자기 난쟁이 같이 키가 작아서 백척 장신의 의친왕과는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빈약한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사이또오 총독이 일부러 일본에서 데려온 강인노미야도 의친왕 앞에서는 무색할이만큼 일거에 케이·오를 당한 것이 통쾌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나라는 없어도 사람은 우리가 낫다』 는 생각에 마음이 흐뭇했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보다 먼저 의친왕에게는 특기할만한 사건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기미년 삼·일 운동직후에 임시경부가 있던 상해로 탈출하려다가 미수로 그친 일이다.
한일합병으로 나라가 망하게되자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해외로 망명을 했던 바 대부분은 중국으로 가고 일부는 노령이나 미국으로 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상해에 임시정부를 설치하고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했었는데 거기에 필요한 비용은 국내로 밀사를 파견해서 자금을 거둬다가 썼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밀사가 되어 국내에 들어왔다가 붙들리는 사람들도 많았으며 차차 날이 감에 따라 「임시정부」에 대한 인식과 성의가 희박해지므로 누구든지 유명한 인사를 국내로부터 끌어내다가 국내외의 주의를 환기시킬 필요가 있었다. 다시 말하면 임시 정부에 캄풀 주사를 놓자는 것이었다.
그에 호응해서 국내에서는 전협, 정남용, 황옥 등이 비밀 결사대 동단을 조직하고 첫 착수로 구한국의 대신으로 일본의 남작을 받은 동농·김가진을 상해로 망명케 하였다.
그는 한일 합병 때에 비록 남작이 되기는 했으나 기골이 있는 애국자였으므로 당시 중학생이던 아들 의한군을 데리고 상해로 탈출한 것인데 이로 말미암아 임시정부는 갑자기 활기를 띠게되었으며 『전 대신이요, 남작이던 사람까지 일제의 학정에 견디다못해서 상해로 탈출했다』는 기사가 전세계에 보도되었으며 그 때문에 임시정부의 비중은 한층 무거워졌던 것이다.
그 다음으로 탈출하려던 사람이 바로 의친왕이었으니 처남인 김춘기(6·25때 납북)와함께 상제로 변장하여 「방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기차로 국경을 넘어가다가 그만 안동현에서 발견되어 모처럼 결행하려던 그의 장거도 필경 와해되었으며 의친왕은 왕족이기 때문에 무사하였으나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대동단은 해산되고 기소된 사람만 43명에 달하였다. 그때에 만일 의친왕이 상해로 망명하는데 성공하였더라면 김가진 때 이장으로 큰 효과가 있었을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거니와 어쨌든 이 사건은 의친왕 일생일대의 걸작이라고 할 것이다.
풍류남아 의친왕은 1955년8월 서울에서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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