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리와 주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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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며칠 전 웬 낯선 남자가 우리 집을 찾아 왔다. 그의 손에 든 두툼한 장부로 대뜸 세리임을 눈치챘어야 했지만 집을 찾아온 낮선 남자에게 우선 누구시냐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힐끗 이쪽을 쳐다보는 것으로 나의 물음을 묵살하고 장부를 한참 뒤적거리더니 가옥세를 내린다.
그런데 그 말투가 의상 값을 받으러온 사람처럼 퉁명스러와 내 마음은 조금 언짢아졌다. 그 바람에 가옥세의 액수를 물은 내 말투는 정말 선뜻 내키지 않는 의상 값을 주려는 사랑처럼 시들해지고 말았다.
우리 집 가옥세는 두달 밀려 있었고 그 밀린 덕택(?)에 벌금까지 붙어 있었다. 그 벌금이라는 말에 나는 또 한번 언짢은 마음이 되어 당장 돈을 세리 앞에 내놓을 기분이 일지 않았다. 또 납세를 미룬다는 내 말에 세리는 잔득 찌푸린 얼굴로 이젠 오지 않겠으니 이쪽에서 갖다 바치라고 호령을 하고 갔다.
말끝마다 나의 비위를 건드리는 그의 무분별한 말투가 얼마 안 되는 가옥세를 두 달 동안 밀리게 한 이쪽의 잘못에 기인했다면 나는 이런 수선쯤은 삼갈 아량이 우러났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두달 전에도 그의 말투는 오늘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십여 년 간 우리 집을 찾아온 모든 세리의 말투가 천편일률로 이쪽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이젠 이쪽에서 가옥세를 밀리게 한 이유가 세리의 그 불쾌한 말투 때문이라고 말해도 변명으로 오해되지 않을 줄로 믿는다.
세금을 받으러 왔을 뿐인 낯선 남자에게 불쾌한 언사를 들은 주부의 섬약한 미음은 처녀 때 웬 놈팽이에게서 희롱을 당한 것만큼 모욕감으로 울적했다.
만일 세리의 그 전 근대성이 농후한 모욕적인 언사를 조절하지 못한다면 납세에 불성실한 주부의 「사보타지」는 계속되지 않을까 한다<이남희·주부·28·강원도 영월군·상동면 구래 1리 98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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