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7) 백제 찾기에 바친 40년 전 부여 박물관장 홍사준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별로 남은 것이 없던 옛 백제의 모습이 해방 25년 동안에 많이 드러났고 또 정리되었다. 이미 황폐해 버린 지 오랜 산기슭에서, 강가에서, 혹은 밭고랑에서 1천4백여 년 전의 유물이 하나 둘 나타나 삼국 중에서 가장 찬란하고 원숙했던 백제문화는 점차 복원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 복원 작업의 주역을 담당해 오는 연재 홍사준씨(65세)는 전 국립박물관 부여박물관장.
『부여가 낳은 유일한 생존하는 백제인』으로 일컬어지는 만큼 백제의 옛 강토를 지키고 개발하는 이곳 태생이다.
그가 없었던들 백제의 모습을 찾아 볼 도리가 없었을 정도로 옛 서울 부여에도 또는 학계에도 그것을 아껴 간수하는 사람이 적었다.
일찍부터 박물관이 있긴 하지만 막상 얼마 안 되는 기왓장을 진열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홍씨는 홀로 『백제 찾기』운동을 벌임으로써 산골짜기와 들판에 묻힌 많은 문화재를 발견해냈다. 하고 한날 천리를 멀다하지 않고 부지런히 쫓아 다녔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학자가 아니라 백제 애호인이란 편이 합당할지 모른다.
1932년 충남 부여군청의 고적담당직원으로 근무하기 시작한 이래 40년간 줄곧 백제문화에 젖어 살고 있는 홍씨는 일본서기에 자극돼 일제 때에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밤을 도와 읽었노라고 회고했다. 일본에 커다란 문화의 꽃을 이식해준 백제라면 본토에는 더 찬란한 꽃이 피어 있었지 않겠는가. 그것이 어디쯤인가 묻혀 있을 것이 아닌가. 이런 벅찬 호기심에서 평생동안 정력을 외곬으로 쏟아왔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백제가 무엇이 있느냐, 백지가 아니냐고 하는 비난이 도리어 큰 자극이 되었지요. 찾아내고 말겠다는 반발이 생긴 겁니다.』
8·15 직후 홍씨는 국립박물관 부여분관장직에 임명됐다. 역시 박봉의 공무원 생활이요, 인건비 밖에 없는 예산이지만 그는 뜻한 바를 꺾지 않았다. 그는 61년부터 2년간 경주분관장을 지낸 일이 있다. 이때 그는 경주에 남아있는 통일신라 때의 대표적 유물이 모두 백제 사람의 솜씨임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석굴암·다보탑·첨성대 등이 신라의 전통적인 양식과는 다른 선과 볼륨을 갖고 있다는 지론이다. 즉 그것은 포로가 된 백제의 명장인들이 다듬은 것임에 틀림없다고 장담해 말하는 것이다.
『경주의 문화는 당나라의 것을 흡수해 소화한데 불과 하지요. 하지만 백제 문화는 먹고 남아서 신라와 일본에까지 건네 준 겁니다. 신라의 공기는 출어백제란 말입니다.』
홍씨의 관심은 석탑·불상 등 유형의 문화재에만 그쳐 있지 않다. 지리와 민속에 이르기까지 해박하다. 부여 인근의 지명을 고증하여 역사를 엮고 민간에 전승되고 있는 민속이 1천4백여년 전과 어떻게 연관될 지에 대해 골몰하고 있다.
오랫동안 문화재를 벗해 살면서도 그의 서재에는 문화재란 한 점 그릇 부치도 없다. 몇 장의 척본만이 덩그러니 걸려있을 뿐. 그는 백제 유물을 구하는 대로 박물관에 비치한 것이다.
그는 63년에 이 고장 젊은이들을 모아 『다운회』를 만들었다. 『다운회』란 백제인 다운 사람을 길러 장차 부여의 주인공을 만들기 위한 것. 한데 젊은이들은 그 뜻을 이해 못하는 듯. 『아마 시기상조인가 보다』고 그는 토로한다. 혼자서라도 꾸준히 찾아 돌아다닐 도리밖에 없다고 덧붙이는 것이다. <이종석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