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신문고] 밤에 아프면 문 연 약국 찾아 헤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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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서울 서대문구의 한 약국이 심야시간대인 오후 10시에 영업을 하고 있다. 본지가 6~7일 서울시 40여 개 심야약국을 둘러 보니 이 중 14개 약국의 문이 닫혀 있었다. [김상선 기자]

서울 성북구에 사는 김진수(37)씨는 며칠 전 밤늦게 문을 연 약국을 찾느라 진땀을 뺐다. 오후 10시쯤 여섯 살 아들의 온몸에 갑자기 두드러기가 났기 때문이다. 김씨는 대한약사회에서 운영 중인 홈페이지 ‘pharm114’에서 당번약국(심야약국)을 검색한 뒤 해당 약국을 방문했다. 하지만 문이 닫혀 있어 허탕을 쳤다. 이후 당번약국들에 일일이 전화해 운영 여부를 확인한 후에야 약을 구입할 수 있었다. 김씨는 “당번약국은 해당 시간에 당연히 운영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 당황했다”며 “병원의 응급실처럼 일부 약국도 심야시간대에 의무적으로 운영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휴일과 심야에 운영되는 이른바 ‘당번약국’이 약사들의 개인 사정에 따라 문을 닫는 경우가 많아 시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당번약국은 법적으로 지정돼 운영되지 않는다. 대한약사회 내부규정에 따라 2007년부터 자발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개별 약국이 자율적으로 오후 10시 혹은 11시까지 영업하겠다고 근무시간을 올리면 대한약사회에서 홈페이지 pharm114(www.pharm114.or.kr)에 반영하는 식이다. 약사들에게 당번약국 운영은 의무가 아닌 선택사항인 셈이다. 약사 최모(41)씨는 “당번약국 운영은 약사들이 자발적 봉사 차원에서 시간을 쪼개 하는 것”이라며 “개인적인 일이 생길 경우 자리를 비우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했다.

 본지가 지난 6~7일 심야시간대에 마포·서대문·성북·강동구 등에 위치한 40개 당번약국을 둘러보니 이 중 14곳(35%)의 문이 닫혀 있었다. 문이 닫힌 일부 약국에선 부재 중임을 알리는 안내문도 부착돼 있지 않았다.

 그러나 약사업계에선 “심야 운영은 자발적 봉사 차원인데 ‘당번약국’이란 명칭 때문에 법적 의무사항인 것처럼 오해가 생겼다”는 반응이 나온다. 대한약사회는 지난달 당번약국을 대체할 용어에 대한 공모를 했다. 대한약사회 관계자는 “약사들이 심야시간이나 휴일에 자발적으로 영업하고 있음에도 일부 지켜지지 않은 사례가 부각돼 난감하다”며 “국민이 (당번약국을) 법적 의무사항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공모를 했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서울시에선 당번약국의 실태를 점검하거나 계도하는 등 손도 대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법적 근거가 없으니 심야에 운영되는 약국에 대한 지원도 없다. 서울시 보건의료정책과 김수진 주무관은 “연휴 등 특수한 경우에만 당번약국이 제대로 운영되는지 체크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당번약국의 의무적 운영을 법으로 지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약사업계에선 당번약국 의무제에 대해 부정적이다. 특히 지난해 11월 편의점의 상비약 판매가 허용되면서 의무제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더 커졌다. 정치권에서도 약사업계에 대한 표심을 의식해 섣불리 관련 법안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이다. 대한약사회 관계자는 “일선 병원과 달리 약사 혼자 운영하는 동네 약국의 경우 의무적으로 심야시간대에 근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며 “모범적으로 운영되는 당번약국에 대해 약사회 차원에서 인센티브를 주는 등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세대 이규식(보건행정학) 교수는 “편의점에서 파는 상비약과 약국에서 파는 전문의약품은 차이가 있으므로 일선 약사들이 책임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며 “편의점 판매 의약품의 범위를 늘리는 것도 한 가지 방안”이라고 말했다.

글=손국희 기자·이지은(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우희선(서강대 신문방송학과) 인턴기자 <9key@joongang.co.kr>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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