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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블랙아웃 돼도 책임질 기관장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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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하루 수십조원의 주식·채권 거래가 이뤄지는 한국거래소는 최근 위기다. 업무 성격상 전산 부분에서 한 치의 오차가 용납되지 않는데도 전산장애가 지난달 두 차례나 발생한 데 이어 최근 문을 연 제3의 증권거래시장 ‘코넥스’는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지난 5월 26일 김봉수 이사장이 사퇴한 뒤 거래소 수장은 석 달째 공석이다. 이사장 선임을 위한 임원 후보 추천위원회가 꾸려졌지만 6월 후보자 공모만 마친 상태다.

한수원, 원전 3기 재가동 못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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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격적인 폭염이 시작된 이번 주 블랙아웃(대규모 정전 사태)이 우려되고 있음에도 에너지 관련 공기업들도 리더십 공백으로 우왕좌왕하고 있다. 한국수력원자력은 원전 비리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고 김균섭 전 사장이 물러난 뒤 지난달 공모 절차를 밟아 15명의 후보자를 받았으나 선임 절차가 중단됐다. 재공모 일정도 잡지 못하고 있다.

 공기업 중 최소 10곳에서 기관장 장기 공백으로 내부 혼란을 겪고 있다. 기관장이 없어도 업무만 잘 돌아가면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기관장 공백에 따라 후속 인사가 지연되고 중요 현안에 대한 신속한 판단이 미뤄지면서 곳곳에서 업무 누수가 발생하고 있다. 한국수력원자력의 경우 책임질 사람이 없으니 시험성적서 위조 사건으로 멈춘 원전 3기가 언제 다시 가동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부품 교체 작업을 못해서다. 부품을 교체하려면 100억원대의 발주를 해야 하는데, 발주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장이 없어 발주 절차를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지역난방공사도 정승일 사장 퇴임 이후 3개월째 사장 자리가 비어 있다. 임원 추천위원회도 꾸리지 못했다. 또 서부발전과 남동발전도 공모 절차를 진행하다 중단됐다. 어쩔 수 없이 현 사장이 업무를 챙기는 파행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도로공사 사장 역시 이미 사퇴 표명을 했지만 후임 사장 공모는 아직 공고조차 내지 못했다. 딱 한 번 열린 임원 추천위원회는 추가 움직임이 없다. 장마와 휴가철·태풍·추석 대책으로 연중 업무 강도가 가장 높은 시기에 기관장 레임덕 상태가 장기화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달 29일 김건호 사장이 퇴임한 뒤 부사장 직무대행 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한국수자원공사는 일상적인 일만 챙기겠다는 분위기가 만연돼 있다. 한 내부 관계자는 “태국 물관리 사업은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에 온 거라 직무대행 체제에서도 가능하다”며 “기관장 인사가 재개된다고 하니 새 사장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기관장 공모가 느린 속도로 진행되면서 안 되면 말고 식으로 지원자가 10~20명씩 몰리는 과열 현상도 빚어지고 있다. 임명에 영향을 미치는 소관 정부부처 간부, 청와대 고위 인사에게 줄을 대려고 관가와 청와대를 기웃거리는 지원자들도 적지 않다.

외풍·과열·눈치 … 공모 지지부진

이창원 한성대 행정학과 교수는 “박근혜 대통령이 법치를 강조하는 만큼 자율경영을 명시한 공공기관운영법의 원칙을 흩트리는 정치 개입을 막아야 한다”며 “공공기관장 인사에 정치가 개입되면 기관 운영 자율성이라는 근본 취지가 퇴색된다”고 지적했다.

 이런 우려는 한국거래소 공모 과정에서 이미 제기됐다. 당시 친박계 정치인 내정설이 나오며 시끄러웠고, 공모 결과 전직 공무원이 대거 출사표를 내면서 11명의 지원자가 공모를 신청했다. 거래소 관계자는 “중단된 인선 절차를 다시 시작할지, 공모 절차를 다시 거칠지에 관해 청와대와 금융위원회에서 아무런 얘기가 없어 답답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7일 지원자 공모를 개시하는 농어촌공사에도 정치권의 영향력을 동원할 수 있는 전직 국회의원 3~4명이 자천타천으로 출사표를 던진 상태다.

 22명이 공모에 응한 코레일도 과열 양상이다. 코레일은 6월 17일 정창영 사장 퇴임으로 기관장 공백이 두 달째 접어들었다. 현재 직무대행체제에서 비상경영체제가 가동되고 있지만, 소송에 휘말린 용산개발 문제와 KTX 민간사업자 참여 같은 중대한 사안에는 본격적인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다. 코레일 관계자는 “사장 공모 때까지 필수적인 사안 외에는 결정이 보류돼 있다. 혼란 방지를 위해 인사도 동결된 상태”라고 말했다.

정부 인사까지 덩달아 지체

 산하기관 인사가 중단되면서 정부 인사가 덩달아 지체되는 경우도 있다. 금융위원회는 산하기관행이 거론되는 고위직들의 행로가 안갯속으로 빠지면서 1급, 국장 인사가 줄줄이 지연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금융지주는 9개 계열사 대표 선임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있다. 우리지주 관계자는 “후보 명단이 올라간 지 한 달이 넘어간 상태지만 아직 답이 없다”고 말했다. 지난달 29일 강영구 원장이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보험개발원도 후임자 선임이 안 돼 직무대행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김동호·조민근·최선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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