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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보호무역' 오바마 역주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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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무역을 강조해 온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예상을 깨고 보호무역 용도의 ‘칼’을 빼들었다.

 오바마 행정부는 3일(현지시간) 애플의 스마트폰과 태블릿PC 등에 대해 수입을 금지한 국제무역위원회(ITC)의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마이클 프로먼 미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이날 어빙 윌리엄슨 ITC 위원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무역정책실무협의회(TPSC), 무역정책검토그룹(TPRG), 관련 당국 및 당사자들과의 심도 있는 협의를 거친 결과 ITC의 수입금지 결정을 승인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로비에 자유무역 옹호 입장 뒤집어

 올 6월 ITC는 애플 아이폰4와 아이패드2 등이 삼성전자 통신 관련 특허를 침해했다고 판단해 수입금지를 결정했었다. 애플 제품이 중국에서 만들어져 미국으로 수입되기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을 경우 60일이 지난 이달 5일부터 애플 제품에 대한 수입금지가 발효될 예정이었다. 당초 업계에서는 1987년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이래 거부권이 오랫동안 유명무실해진 만큼 애플 제품의 수입금지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바마 대통령은 26년 만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불과 며칠 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후 한국에서의 미국산 자동차 판매가 18% 늘었다고 자랑할 정도로 자유무역을 강조하는 성향이었다. 게다가 미국은 연구개발(R&D)의 결과물인 지적재산권을 과도할 정도로 강하게 보호해 왔다. 이런 점에서 이번 거부권 행사는 매우 이례적인 조치로 해석된다.

레이건 이후 26년 만에 거부권

 프로먼 대표는 “미국 경제의 경쟁 여건에 미칠 영향과 미국 소비자들에게 미칠 영향 등 다양한 정책적 고려에 대한 검토 끝에 내린 결정”이라고 말했다. 특히 준사법적 독립기구인 ITC의 권고를 거부한 데 대한 부담을 감안한 듯 “ITC의 결정 자체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며 표준특허로 수입금지를 내리는 것은 과하다는 의미”라며 “특허 소유자들은 법원을 통해 그들의 권리를 계속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수입금지 품목이 구형 아이폰이어서 애플이 입을 직접적인 피해는 크지 않겠지만 ‘혁신의 산실’이라는 명성에 흠집을 내기 곤란하다는 속사정도 작용했다. 미국 언론들은 ‘뜻밖의(unexpected) 결정’(IT 전문매체 CNet)이라는 반응과 함께 최근 미 재계와 정계에서 백악관을 상대로 강한 로비를 벌인 게 주효한 것 같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미 지적재산권 보호 전통 퇴보

뉴욕타임스(NYT)는 “공화·민주당 소속 상하원 의원들이 프로먼 대표에게 ‘미국의 공익을 고려해 신중하게 결정해줄 것’을 촉구했었다”고 전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특허 및 통상 전문가들의 말을 빌려 “미 행정부가 ITC의 특허보호 결정을 뒤엎은 것은 미국의 지적재산권 보호 및 자유무역 전통을 퇴보시킨 조치”라고 분석했다. FT는 “세계의 모든 나라가 자국 기업을 보호하고 나서는데 미국만 예외일 순 없지 않느냐”는 미국 내 목소리를 소개하면서 미국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지적재산권 보호 전통이 훼손된 데 아쉬움을 표했다.

삼성전자는 "애플이 특허를 침해하고 사용료 협상에 성실히 임하지 않았음을 인정한 ITC의 최종 판정이 번복돼 유감”이라고 밝혔다.

  워싱턴=박승희 특파원, 심재우 기자

◆국제무역위원회(ITC)=미국 대통령 직속의 준사법적 독립기관이다. 미 대통령이 임명한 6명의 위원으로 구성된다. 각 위원의 임기는 9년이다. 미국무역대표부(USTR)와 함께 국제 통상문제를 담당한다. 외국의 특정 업체가 덤핑을 하는지 여부와 이에 따른 미국 내 산업 피해를 조사해 대통령에게 수입금지 등을 권고할 수 있다. 특허를 침해한 수입 제품도 조사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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