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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美, 과거 이라크에 생화학무기 제공했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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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이라크를 공격하려는 미국의 집요한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잇따라 터지고 있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으로선 진퇴양난일 것 같다.

지난 주말 전 세계에서 벌어진 사상 최대의 반전 시위로 독일-프랑스로 이어지는 반전 축의 입지가 강화되면서 부동(不動)의 동맹국인 영국마저 주춤하고 있다.

또 천신만고 끝에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터키 지원 합의를 이끌어 냈으나 정작 터키는 "정치.경제.군사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미군 주둔을 허용하지 않겠다"며 버티고 나섰다. 미국으로선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힌 셈이다.

이 와중에 이번엔 미국이 이라크에 생화학무기를 지원한 혐의로 제소돼 국제사법재판소의 재판을 받는 아이로니컬한 일이 발생했다. 미국을 제소한 나라는 이란. 이란은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라크의 동맹국이었던 미국이 화학무기와 인체에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이라크에 제공했다며 92년 미국을 제소했다.

17일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시작된 구두심리에서 이란 대표단 대변인인 모하마트 자헤딘 라바프는 "이란은 미국의 이라크 지원에 대한 유죄판결 외에도 87~88년 페르시아만에 있던 이란의 3개 해상유전 파괴에 대한 손해배상도 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란 측은 미국의 이라크 지원과, 이란 해상유전 파괴는 55년 체결된 미.이란 우호협력조약을 파괴한 것으로, 이는 국제사법재판소 제소 사유로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미국 측은 "미국 함정에 대한 이란의 미사일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일어난 일"이라며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어쨌든 양국 대표단은 앞으로 3주 간에 걸쳐 치열한 법정 공방을 벌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생화학무기 지원이 구체적으로 드러날 경우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WMD)를 빌미로 공격하려는 미국의 전쟁 명분은 크게 빛이 바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만약 이 재판에서 이란이 승소할 경우 미국의 도덕성은 결정타를 맞을 수밖에 없다.

유재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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