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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관료주의 극복해야 창의사회 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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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오세정
기초과학연구원장
서울대 교수·물리학

새 정부가 출범한 지 5개월이 넘었지만 아직도 가장 중요한 화두 중 하나인 창조경제에 대해 말이 많다. 개념이 분명하지 않다는 비판도 있고, 정부가 창조경제를 위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도 있다. 일부에서는 “과거처럼 자본·노동 같은 요소를 투입해 경제를 성장시키는 모델은 이제 효용이 다했고, 앞으로의 성장은 개인의 창의력에 의존해야 한다”는 개념으로 받아들이면서 당연히 가야 할 방향이라는 의견을 보이지만, 다른 쪽에서는 좀 더 구체적인 모양과 전략을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어쩌면 창조경제에 대해 이처럼 논란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창조라는 것은 원래 혼돈 속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는 “하늘 아래 정말 새로운 것은 없다. 단지 새로운 조합만이 있을 뿐이다”고 말한 바 있다. 즉 우리가 무(無)에서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거의 없고, 보통 창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존재하던 요소들의 새로운 조합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스마트폰은 전화기와 컴퓨터의 조합이라고 볼 수 있고, SNS 는 과거의 사랑방 모임을 인터넷환경을 이용해 사이버 공간으로 가져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과거에 이미 존재하던 것들이라도 새롭게 조합하면 우리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고, 새로운 경제시스템을 창조하기도 한다. 아마도 박근혜정부가 추구하는 창조경제가 이런 것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창조는 잘 확립된 하나의 분야 내(內)에서 생기기보다 주로 분야들 간의 ‘경계’점에서 생긴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화기와 컴퓨터의 경계점에서 스마트폰이라는 제품이 생겨났고, 타인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인간의 사회적 욕구와 새로운 인터넷 기술이 결합되어 SNS가 나타난 것이다. 프랑스의 천재 수학자 푸앵카레는 “우리가 선택하는 조합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서로 완전히 다른 영역에서 빌려온 요소들로 형성된 것이다”고 말했다. 스티브 잡스가 인문학적인 상상력과 과학기술을 적절히 조합해 새로운 산업을 창조하고 수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내듯이 창조경제는 이처럼 분야 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정신이 있어야 꽃핀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우리 사회에는 이런 자유로움이 부족하다. 고등학교 때부터 문과와 이과를 나누어 교육하고 있고, 대학에서도 학과 간의 벽은 높기만 하다. 아마도 이러한 영역 가르기가 가장 심한 곳은 관료 사회가 아닐까 한다. 사실 막스 베버(Max Weber)가 지적했듯이 ‘정확한 영역 정의’와 ‘정해진 규칙에 의한 집행’이 관료주의의 특성 중 하나이며, 이러한 특성은 관료주의가 근대국가의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그러나 분야 간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경계점을 아울러야 하는 현대 창의사회에서 이러한 관료적 경직성은 사회와 경제 발전에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한다.

대표적인 예가 IPTV를 둘러싼 과거의 논란일 것이다. IPTV는 초고속 인터넷 망을 이용해 방송과 동영상 등을 텔레비전 수상기로 볼 수 있는 서비스다. 말 그대로 인터넷과 TV의 융합서비스인데, 바로 이 점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방송인지 통신인지를 놓고 정부부처끼리 관할다툼을 하는 바람에 기술개발이 끝난 뒤에도 실제 서비스는 몇 년이나 지연되었던 것이다. 관료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영역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런 경직성은 유망한 미래 산업을 시작부터 방해한 꼴이 되었다.

 관료주의의 ‘정해진 규칙에 의한 집행’도 그 규칙이 시대에 뒤떨어졌거나 민간 활동을 과도하게 규제하면 창의사회로 가는 길에 걸림돌이 된다. 우리나라에서 창조경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선도적 과학기술 성과들이 나오는 것이 필수적인데, 성과를 내야 할 현장의 연구자들은 연구보다 과도한 행정규제에 맞추느라 바쁜 실정이다. 얼마 전에도 연구비 감사에서 연구행정보조원의 인건비를 간접비가 아니라 직접비에서 지불한 것이 규정위반이니 환수하라는 조치가 내려진 바 있다. 많은 연구원들은 직접비나 간접비나 정부의 돈이긴 마찬가지인데 규정이 너무 경직되었다고 느끼며, 앞으로 신경 써야 할 행정적인 일만 하나 더 늘었다고 불평이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싫으나 좋으나 창의사회로 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의 창의력이 최대한 발현될 수 있도록 사회 시스템도 바뀌어야 한다. 그중에서도 관료주의 극복은 중요한 과제다. 특히 과학기술 연구에서는 규제를 최소화하고 규제하더라도 금지하는 것만 나열하는 네거티브 시스템으로 바꾸는 것이 시급하다.

오세정 기초과학연구원장 서울대 교수·물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