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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모욕하는 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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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엄을순
문화미래이프 대표

멍순이와 멍석이. 동거한 지 석 달 된 강아지들 이름이다. 10분 차이로 한 배 속에서 나왔다니 이란성 쌍둥이인 셈인가.

 이름을 강아지 멍(?)에 남편과 내 이름 끝 자를 붙여서 만들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암컷과 수컷의 생김새가 너무나 다르다. 암컷인 멍순이는 브이라인 얼굴에다 속눈썹까지 살짝 올라가 새침데기 여자 얼굴이고 수컷인 멍석이는 얼굴도 코도 둥글둥글, 발바닥도 몸통도 멍순이의 한배 반은 된다.

 2년 전, 시골로 내려오면서 제일 하고 싶은 일은 마당에서 개 키우는 일이었다. 지속적인 보살핌이 필요한 작은 개보다는 외롭거나 무서울 때마다 기댈 수 있는 듬직한 개였으면 했다.

 충성심 있고 듬직한 진돗개라든가 품위 있고 믿음직한 골든 리트리버. 그런 개를 구한다는 소문을 냈다. 연락이 왔다. 건축 일을 하는 친구가 키우는 데 외롭지 않게 암수 두 마리를 주겠단다. 종자를 물었다. 진돗개와 리트리버의 잡종이란다. 사나운 진돗개와 ‘순하디순한’ 리트리버. 그 둘이서 사랑을 어찌했을까 궁금했지만 어쨌든 꿈을 가지니 꿈은 이루어지더라.

 드디어 한 달 된 강아지 두 마리가 집에 왔다. 그들은 예뻤다. 모델만큼 월등한 외모에다 반짝이는 털과 앙증맞은 발바닥. 진돗개의 영특함과 리트리버의 품위까지 갖춘 고품격 강아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영락없이 강아지 인형이다. 그러던 애들이.

 종자가 큰 개라 그런가. 앙증맞은 발바닥이 곰 발바닥같이 변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크더니 날이 갈수록 더 극성맞아지고 부산스럽고 정신없고. 창문에 붙어 있는 방충망은 성한 게 하나 없고, 신발이라고는 모조리 물어뜯어 멀쩡한 신발 찾기 힘들고, 봄에 힘들게 심어 놓은 꽃들은 다 파헤쳐 놓아 뿌리가 다 하늘로 치솟아 놓여 있고, 옆집까지 원정을 가서는 그 집 마당에 파묻은 음식쓰레기까지 파먹고 시꺼먼 주둥이를 하고 돌아오기 일쑤고.

 그럴 때마다 야단을 치면 꼬리를 힘차게 흔든다. 재밌는(?) 그 놀이를 함께하자는 건지, 같이 놀자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애초에 버릇을 잘 들여야 했다. 애타게 기다리다 태어난 아이는 버릇없는 아이 될 확률이 높다고 하더니만, 딱 그 짝이다.

 하지만 말썽 피우며 놀다가도 이름만 부르면 어디선가 총알같이 달려와 품에 덥석 안긴다. 마치 위급할 때마다 이름을 부르면 나타나는 황금박쥐 같다. 벌써 그들이 든든하다. 내가 오란다고, 총알같이 달려와 안길 사람(이나 동물) 어디 있겠는가. 망가진 방충망이야 테이프로 기워 쓰면 되고, 좋은 신발은 신발장에 잘 감추면 되고, 꽃은 봄에 다시 심으면 되고, 음식쓰레기 먹고도 멀쩡한 튼튼한 위를 가졌으니 다행이고.

 16살짜리 뽀삐라는 이름의 개와 사랑에 빠진 60 중반의 선배님이 한 분 있다. 직업상 부인과 떨어져 딸 부부와 살고 있는데, 동거녀(?)인 뽀삐와의 사랑이 각별하다. 종자가 푸들인 그 개 얘기만 나오면 눈꼬리가 가늘게 찢어지면서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시는 표정. 영락없는 애인 사이다.

 어느 날은 개를 데리고 산책하다가 화려한 치장의 어떤 예쁜 할머니랑 벤치에 앉아 얘기를 하는데, 갑자기 뽀삐가 둘 사이로 파고들면서 할머니를 밀쳐내더란다. ‘허허, 우리 뽀삐는 개가 아니라 사람이야’ 하며 흐뭇해하시던 모습. 혼자 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녘 옆구리에 온기가 느껴져 깨 보면 뽀삐가 엉덩이를 밀어 붙이고 누워 있다면서 그 따스한 느낌은 아무도 모를 거라며 흥분하시던 모습. 그럴 때마다 반가워 ‘뽀삐가 왔구나’ 하면, 쪼르르 문 쪽으로 달려가 산책 가자고 조르던 애가 요즘은 나이 들어서인가 눈 감은 채로 꼬리만 흔든다는데. 16살의 뽀삐. 언젠가는 그 애와 헤어져야 하는데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미어진다면서 말을 잇지 못하던 그 사람.

 이달 초에 ‘친하게 지내던 여자를 성폭행하고, 죽이고, 커터 칼로 시신 훼손까지…’ 하면서 ‘난 오늘 개XX가 돼 보고 싶어서…’ 그랬다는 글까지 SNS에 올렸다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 이건 개에 대한 모독이다. 개는 그런 짓 안 한다.

 개보다 못한 자들이 많아진 요즘. 이제 ‘개 같은 X’나 ‘개보다 못한 X’란 말이 더 이상 욕이 아닌 세상이 됐다.

엄을순 문화미래이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