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늘 한·일전 … 한국 파워냐, 일본 테크닉이냐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33호 19면

24일 오후 화성종합경기타운에서 열린 ‘2013 동아시안컵 축구선수권대회’ 한국과 중국의 경기에서 홍명보 감독이 선수들에게 작전을 지시하고 있다. [뉴스1]

2013 EAFF 동아시안컵의 하이라이트는 28일 오후 8시 서울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리는 한·일전이다.

동아시안컵 축구 숙명의 한판

 홍명보(44) 감독이 이끄는 한국은 호주와 중국을 상대로 두 번 모두 0-0 득점 없는 무승부에 그쳤다. 호주와의 첫 경기에서는 무려 21개 슈팅을 때리며 경기를 압도했다. 중국과 경기에서는 호주전에 나서지 않았던 선수들을 중심으로 베스트 11을 구성하며 전력을 점검했다. 홍 감독은 두 경기를 통해 최정예를 가려 한·일전에 나서겠다는 계산이다. 일본은 중국과 첫 경기에서 난타전 끝에 3-3으로 비겼고, 호주와 2차전에서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인 끝에 3-2 승리를 거뒀다. 일본은 1승1무로 1위를 달리고 있지만 2무의 한국도 일본과의 최종전에서 승리하면 대회 챔피언에 오를 수 있다. 하지만 한·일전이 중요한 건 우승컵이 달려 있기 때문이 아니다. 다른 모든 경기를 져도 한·일전만 이기면 된다. 반대로 설령 우승을 차지한다고 해도 한·일전에서 패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게 바로 한·일전이다.

한·일전의 추억
사상 첫 한·일전은 1954년 3월 7일 도쿄에서 열렸다. 해방 후 채 10년도 지나지 않았던 때였다. 54년 스위스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이었다. 일본과 홈앤드어웨이로 겨뤄 승리하면 사상 처음 월드컵에 진출할 수 있었다. 축구는 홈경기가 절대적으로 유리하지만 “일본인이 한반도 땅을 밟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의지가 더 강했다.

 한국은 일본에서 두 경기를 다 치러야 했다. 사실 일본으로 출국 허가를 받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이유형 감독은 “일본에 패하면 선수단 모두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밝히고 결전에 나섰다. 한국은 악천후 속에서 열린 첫 경기에서 체력과 체격 등 피지컬은 물론 발기술 등 테크닉에서도 상대를 압도하며 5-1로 대승을 거뒀다. 한국은 일주일 후 열린 2차전에서는 무승부를 거두며 1승1무로 사상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뤘다.

 한동안 일본 축구는 한국의 상대가 안 됐다. 라이벌이라기보다는 만만한 먹잇감이었다. 80년대까지는 48전 30승11무7패로 승률이 62.5%에 달했다. 10번 싸우면 6~7번 이상 이겼고, 비기거나 패한 게 서너 번 정도였다. 하지만 90년을 기점으로 기류가 변했다. 90년대 이후에는 27전 10승11무6패로 승률이 37.0%로 뚝 떨어졌다. 역대 전적은 75전 40승22무13패다.

 일본 1만 엔권 지폐에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라는 일본의 근대 사상가가 찍혀 있다. 대동아공영권을 꿈꾸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정신적 스승이다. 그의 대표적 이론이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이다.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이 걷는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근대화론이다. 후쿠자와의 사상은 세월을 훌쩍 건너뛰어 80년대 일본 축구에도 접목됐다. ‘아시아에서 아등바등 경쟁하는 게 아니라 눈높이를 유럽 축구에 맞추고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탈아입구’가 일본 축구의 목표이자 슬로건이 됐다.

 일본은 자존심을 버리고 브라질 출신 미드필더 라모스(56)와 스트라이커 로페스(44) 등 능력 있는 브라질 출신 외국인 선수에게 대표팀 문호를 개방했다. 치밀한 준비 과정을 거쳐 93년에는 J리그가 출범했다. J리그 출범과 함께 백년 구상이라는 장기 발전계획도 세웠다. 체력은 약하고 전술은 너무 교과서적이라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뻔히 보였던 일본 축구가 이때부터 달라졌다.

 93년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94년 미국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한국은 가까스로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우리에게 ‘도하의 기적’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일본에서는 이를 ‘도하의 비극(ドーハの悲劇)’이라고 칭한다. 일본이 한국을 거의 따라잡았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대회였다.

달라도 너무 다른 한국과 일본
한국과 일본은 일하는 방식이 확실히 다르다. 대표팀 감독 선임만 봐도 알 수 있다. 98년 프랑스 월드컵이 끝난 직후부터 지금까지 일본 대표팀 사령탑은 필리프 트루시에(1998~2002 한·일 월드컵), 지코(2002~2006년 독일 월드컵), 이비차 오심(2006~2007), 오카다 다케시(2007~2010 남아공 월드컵), 알베르토 자케로니(2010~현재) 등 5명에 불과하다. 월드컵이 끝나면 일본 대표팀의 부족한 점을 분석하고 이를 극복할 비전과 역량을 지닌 새 감독을 뽑아 지휘봉을 맡겼다. 2007년 오카다 감독으로 사령탑을 바꾼 건 전적으로 오심 감독의 건강 문제 때문이었다.

 반면 한국은 걸핏하면 감독을 바꿨다. ‘다이내믹 코리아’답게 감독 경질도 다이내믹하다. 월드컵이 끝난 뒤 감독이 된 사람이 4년 동안 장수한 사례는 단 한 번도 없다. 98년 프랑스 월드컵 기간 중에 차범근(60) 감독을 해임한 뒤 무려 10번이나 감독을 바꾸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마치고 허정무 감독이 물러난 뒤 벌써 조광래(59)·최강희(54)에 이어 세 번째 사령탑 홍명보가 지휘봉을 잡고 있다. 한심해 보이지만 때로는 이 같은 방식이 적중해 2002년 히딩크(67) 감독의 4강 신화 같은 기적을 만들기도 했다.

일본, 짧은 패스의 유럽 스타일
오래전부터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그 로드맵에 따라 착착 일을 진행해 나가는 일본 스타일과 달리 한국은 즉흥적이지만 임기응변에 강하다. 일본의 방식이 더 좋아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다를 때도 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처럼 일본 사회는 매뉴얼에 없는 대사건이 발생하면 아무도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한국은 아무 준비도 안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막상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놀라운 집중력과 희생정신을 발휘해 목적을 달성할 때도 많다. SNS 파문 등으로 극심한 홍역을 치렀지만 한국 축구가 홍명보 감독 부임 이후 동아시안컵에서 확 달라진 모습을 보이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축구 스타일도 다르다. 벌써 20년 넘게 유럽 축구를 모방한 일본 축구는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찾아나가고 있다. 짧은 패스로 조직적으로 연결하는 축구다. 한국보다 훨씬 더 현대 유럽 축구에 가까운 전술을 구사한다. 한국 역시 이 같은 방식의 축구를 집중 연마했던 적이 있다. 조광래 감독 재임 시절이다. 2011년 8월 10일 광복절을 닷새 앞두고 삿포로에서 열린 한·일전에서 0-3으로 참패를 당했다. “일본이 잘하는 방식으로 한·일전에 나선 게 패인”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홍 감독은 동아시안컵을 앞두고 “한국 선수의 장점을 살린 ‘한국형 축구’를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지난해 런던 올림픽 3~4위전으로 열린 한·일전을 앞두고 홍 감독은 일본의 경기 장면이 담긴 비디오를 보여 줬다. 일본과 헤딩볼을 경합하는 다른 팀 선수가 몸을 사리는 장면에서 일시정지 버튼을 눌렀다. “일본전에서 이런 경합 장면이 나오면… (잠시 뜸을 들인 뒤) 부숴 버려.” 2-0으로 승리하고 동메달을 목에 걸게 한 한마디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