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1953년 남한을 전쟁 당사자 인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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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한국은 정전협정 당사자가 아니라는 북한의 주장과 달리 김일성 주석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직후 남한을 전쟁 당사자로 사실상 인정한 연설이 공개됐다. 북한은 최근 조선중앙TV를 통해 정전협정 다음날인 53년 7월 28일 평양시에서 열린 정전협정 기념 집회에 참석한 김일성의 연설 장면을 내보냈다.

 집회에서 김일성은 “지난 (1953년) 7월 27일 십(10)시에 판문점에서는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 대표들을 일방으로 하고 미 제국주의자들을 위수(위시)한 무력침공군 대표들을 타방(다른 일방)으로 하여 정전협정이 체결됐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러면서 “조선에서 정전의 달성은 외래제국주의련합세력을 타승하고 미 제국주의, 리승만 매국도당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하는 우리 조국 인민이 3년간에 걸친 영웅적 투쟁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리승만 도당들을 반대하여 3년간 벌인 투쟁’이라고 한 데 대해 익명을 원한 국방부 당국자는 “김일성의 연설은 국군을 교전 당사자이자 정전협정 당사자로 인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일성이 판문점에서의 정전협정 서명식에 직접 참석하려다 소련이 신변안전 문제를 들어 반대하자 이를 받아들여 불참했던 사실도 본지가 입수한 문건에서 드러났다. 북한군 최고사령관인 김일성의 서명식 참석 여부까지 소련에서 결정한 셈이다.

 당시 평양 주재 소련 대리대사였던 수즈달레프가 본국에 보고한 비밀문건에 따르면 53년 6월 13일까지만 해도 김일성은 신변안전 등의 이유로 협정 서명식에 불참하겠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같은 달 16일 소련 측이 신변안전을 보장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하자 7월 2일에는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민족보위상(현 인민무력부장) 최용건을 포함시키는 조건으로 서명식에 참석하겠다는 뜻을 수즈달레프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결국 김일성은 서명식장에 나오지 않았다.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의 서명식 참석이 불투명하고, 신변안전 보장이 확약되지 않은 상황이란 이유에서였다.

당시 북한과 소련, 중국 관계자들은 협정 체결 이틀 전(7월 25일)까지도 이 문제를 놓고 토론해 최종적으로 김일성의 불참을 결정했다. 결국 53년 7월 27일 10시에 시작된 정전협정에서 윌리엄 해리슨 중장과 남일 북한군 대장은 문산과 개성에서 기다리고 있던 클라크 사령관과 김일성을 각각 찾아가 서명을 받고 이를 다시 교환하는 방식으로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정용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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