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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시간이 돈" 중재, 은밀하고 빠른 해결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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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대우일렉(현 동부대우전자)은 동부그룹으로 인수되기 직전인 지난 3월 이란 회사에 400억원 가까운 합의금을 지급한 ‘악몽’이 있다.

 사연은 이렇다. 대우일렉은 2006년 이란 판매 독점권을 갖고 있던 현지 기업 파슨의 실적이 부진하자 “최저 구매 의무 조항을 위반했다”며 공급 계약을 해지했다. 그런데 파슨이 오히려 “제품이 불량해 판매량이 급감한 것”이라며 대우일렉을 상대로 국제상업회의소(ICC) 국제중재법원에 중재(仲裁)를 신청했다.

 칼자루를 쥔 쪽은 대우일렉인데 영국 출신의 중재인이 두바이 법을 중재 효력을 갖는 준거법으로 결정하면서 반전이 일어났다. 두바이 법의 ‘신의성실 의무’를 강조하면서 대우 측을 몰아붙인 것. 두 기업 간 분쟁이 터졌으나 중재인은 한 번도 한국을 찾지 않았다. 중재에 지면서 대우일렉은 9808만 달러(약 1097억원)를 꼼짝없이 물어줘야 할 판이었다. 이 회사 채권단은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중재판정 집행소송을 제기했으나 결국 파슨 측에 3500만 달러(약 392억원)를 물어주는 것으로 합의했다. 대우일렉의 최근 3년간 평균 영업이익이 82억원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5년치 가까운 영업실적을 앉아서 까먹은 셈이다.

 윤병철 김앤장 변호사는 “기업인들이 국제중재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들어 있다”고 강조했다. 계약조항을 무심히 넘기거나 중재 심리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할 경우 기업이 휘청거릴 정도로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대우일렉과 파슨의 계약서에 ‘중재지는 서울로 한다’ 또는 ‘계약 이행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한국 법률을 적용한다’는 조항만 있었어도 이렇게 확대될 사안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계약서에 서명한 대로 사업이 착착 진행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세상사가 그렇게 녹록지 않다. 분쟁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이런 때를 대비해 거래 계약서에 중재 합의 조항이 들어간다. 중재는 기업 간 거래에서 분쟁이 발생했을 때 소송 대신 이용할 수 있는 분쟁 해결 방법이다. 구속력을 가진 제3자가 심판을 하고, 국가의 강제 집행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법적 권리가 보장된다. 대한상사중재원 김광수 수석위원은 “재판부를 당사자가 결정하는 것이 다를 뿐 절차는 구두 변론과 증인 심문 등이 소송과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최근 영어로 작성된 거의 모든 계약서에 중재 조항이 들어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국가 간 교역 증가,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등으로 국내 기업이 해외에서 분쟁에 휘말리는 사례가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1998~2010년 ICC에 접수된 한국 기업 관련 중재 사건은 340건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많았다. 국내에서도 중재 분쟁이 급증하고 있다. 지난해 상사중재원에 접수된 사건은 모두 360건. 최근 5년 새 100건 가까이 늘어났다.

 기업들엔 비교적 해결 기간이 짧고 비밀이 유지된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일반 소송이 3~5년 걸리는 데 비해 중재 판정은 통상 1년6개월~2년이면 종료된다. 비공개가 원칙이므로 기업 비밀을 유지할 수 있다. 요컨대 ‘은밀하게’ 그리고 ‘속도 있게’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중재다.

 ‘무모한 민자 사업’의 결정판으로 불리는 용인경전철이 어렵게 회생 실마리를 찾은 것은 중재의 장점인 ‘속도감’을 보여주는 사례다. 2010년 준공을 앞두고 용인시와 민자 사업자(용인경전철㈜) 사이에 안전성 문제를 놓고 갈등이 불거졌다. 양측은 계약 조항에 따라 ICC에 중재를 신청했고 1년6개월여 심리 끝에 용인시가 패소했다. 용인시가 경전철 사업비 5159억원과 시설 운행을 못해 발생한 손실금 2628억원을 배상하라는 내용이었다.

 상당한 액수지만 그나마 빠른 판정 덕분에 신규 투자자를 유치하면서 용인경전철은 조기 가동이 가능해졌다. 법무법인 김앤장의 정교화 변호사는 “이 건이 법정 소송으로 갔다면 최종 3~4년은 소요됐을 것”이라며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방치된다면 경전철 설비는 고철이 됐을 수 있다”고 말했다. 수요를 부풀린 무리한 투자는 안타깝지만 빠른 중재 진행으로 그나마 회생 방안을 모색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최근엔 여기서 한발 더 진화하기도 한다. 국내 법률기관과 협조해 잃어버릴 수 있었던 회사 재산까지 찾아주고 있는 것. 정보기기 수출업체인 A사는 2007년 미국의 판매 총판이 특허를 침해했다는 사실을 알고 미국중재협회를 통해 중재를 신청했다. 중재는 ▶누구에게 책임이 있느냐 ▶손해 금액이 얼마냐 하는 2단계로 진행됐다. 1차 중재를 통해 미국 회사가 전액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했다. 미국 회사 대주주가 경쟁사에 회사를 팔아 집행할 재산을 없애버린 것. 이후엔 미국 로펌과 협의해 파산 신청을 했다. 한국 회사와 로펌은 미국 회사 컴퓨터를 뒤져 강제 집행을 피하기 위해 재산을 빼돌렸다는 증거를 찾아냈다. 하지만 미국에선 소송비용이 많이 들고 시간도 오래 걸려 문제 해결은 난항을 겪었다.

 임병우 김앤장 변호사는 "한국 수사 당국에 수사를 의뢰해 해결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피고 회사가 미국에 있어도 한국 형법으로 처벌할 수 있는가’라는 점에서 전례가 없었지만 결국 공소 제기를 이끌어냈다. 한국 대법원은 지난달 미국 회사 대주주에 대해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A사는 중재를 통해 1000억원대 손해를 당할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국제중재 사건 수요가 늘고 국내 법률 시장이 성장하면서 중재 업무를 한국으로 유치하기 위한 시도도 활발하다. 지난 5월에는 서울 서린동에 서울국제중재센터를 개소하기도 했다. 주요한 국제중재 심리를 진행할 수 있는 인프라를 마련한 것. 서울국제중재센터 김갑유(변호사) 사무총장은 “정보기술(IT) 시스템을 활용한 효율적인 법률 서비스로 홍콩·싱가포르 등 경쟁국과 차별화했다”며 “향후 5년간 5000억원대 경제 효과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상재·채윤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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