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가능한 한의 경쟁과 필요한 한의 계획」지침아래…오늘의 집권 그 배경|서독 사민당 백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독일의 사회민주당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라사루」를 영수로 해서 만들어 진 전독일 노동자동맹(1863년)과 「베벨」 또는 「리푸크네히트」를 지도자로 해서 만들어진 사회민주노동자당(1869년)이 1875년에 합동하여 노동자의 정당으로서 「독일사회민주당」(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이 성립된 것이다. 1879년에 「비스마르크」정권은 사회민주의자 쇄압법법을 제정하여 사회민주당을 탄압함으로써 당활동은 위축되고 비합법적인 활동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쇄압법이 폐지된 1890년 이후에 있어서는 당세가 확장되어 1912년에는 독일 「제국의회」에서 제일당이 되는 약진상을 보였었다. 이러한 약진상은 당하부에 있어서 하급지도자의 적절한 활동과 노동자의 이익과 밀착된 일상적활동의 결과인 것이다.
「나치즘」치하에서는 사회민주당은 지하로 잠행하였고 유력한 지도층은 해외로 망명해 당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였었다. 그러나 「나치」당에 의한 강제적동질화작업과 당내의 분파주의는 효과적인 저항단체의 구실을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2차전후 정식부활>
2차대전후독일사회민주당은 동독에 있어서는 공산당과 합동하여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이되고 서독에 있어서는 1946년에 있었던 「하노바」당대회개최에 의하여 정식부활되었다.
사회민주당은 1949년이래 기독교민주당 다음 가는 제2당의 지위를 지녀 왔었다. 그후, 의석수는 계속 증가되어 왔다. 49년에 131석, 53년에 151석, 57년에 169석, 61년 l90석, 65년202석, 이번 69년에는 224석이 된 것이다.
518석의 의석을 갖고 있는 서독연방의회는 서「베를린」에서 선출되는 22개 의석은 의결권이 없기 때문에 연방의회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496석으로 구성되어있는 셈이다.

<당내선 숱한 길항도>
따라서 사민당(224석)과 자민당(30석)의 소연정은 기민당보다도 12석이 더 많아 원내과반수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1912년에는 세계최대의 사회주의정당이었던 사회민주당은 그 발전의 반면에 당내에 있어서는 이론과 실천의 양면에 걸쳐 대립과 항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노동자들 지지받고>
「비스스마르크」시대에 있어서 보면 한편에서는 「마르크스」주의혁명정당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하여 「비스마르크」체제에대한 불신과 저항을 해왔는가 하면 또 한편에 있어서는 합법적인 의회정당의 선을 추진하려는 개량주의적정당인 견해도 나타났던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적 정당으로서의 당의 기본적입장은 1891년 이래 개량주의가 당실천활동에 크게 영향을 줌으로써 1898년에는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당의 이론적지주로 되었다.
사회민주당 때의 지지자들은 직업별로 본다면 노동자가 압도적으로 많고 또 수입면에서 본다면 국민평균소득과 같은 또는 그것보다 조금 높은 수입을 지니는 중간층들이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또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는 사회층도 지지율이 높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데에서 사민당은 지지자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 「마르크스」주의를 지양한 「국민의 정당」으로서 자기위치를 지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기본정책에 있어서 기민당과 커다란 차는 없는 줄 안다. 1959년의 「고데스벨크」강령은 자유와 정의와 연대를 강조하고 사상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하여 기독교적 윤리와 「휴머니즘」과 고전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독점책에 제동>
따라서 당의 기본강령인 경제정책에 있어서도 과격한 사회화정책을 포기하고 있다. 말하자면 『가능한 한의 경쟁과 필요한 한의 계획』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사유와 경쟁의 이점을 내세워 「체제내정당」의 성격을 앞세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사민당은 1887년 당대회같은데에 있어서는 보호관세체계의 부정과 국가독점에 대한 반대의 견해를 강하게 내세웠었다. 「담배」전매안이 나왔을 때에는 『무산자의 세습재산』이라고 비난까지 하였는가 하면 또「술」의 소비세율이 두 개 적용되었을 때는 주조업자들에게 「사랑의 선물」을 보장해 준 것이라고 비판을 가했었다. 수출장려금에 대해서도 반대하였었다. 이러한 일련의 관세·소비세·장려금등에대한 거부적 입장은 당시사민당의 성격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된다.
「곡물과 철」을 위한 80년대의 보호관세정책은 독일공업의 발전을 가져 왔지만 곡물가격하락은 독일농업의 정체를 가져와 곡물에 대한 관세보호의 강화를 요청하게되었다. 이러한데에서 87년 관세율인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이 조치는 외국의 보복관세정책을 유발하였고 대내적으로는 노임의 승등을 가져와 국제경쟁력을 저하시켜 불경기를 초래하였었다. 이러한데에서 「루르」지방의 광산노동자의 파업이 발생하였고 노동자의 조직적운동이 강력히 전개되었던 것이다. 사민당의 당세가 확대된 것은 물론이다.

<계급정당 성격 탈피>
그러나 사민당은 이미 그 계급정당으로서의 성격에서 벗어나서 국민의 정당으로서 이행되고 있다.
이제까지에 있어서도 기민당과 내정문제에 있어서는 별로 큰차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독일의 통일을 주장하고 그것을 위해서 독일의 중립화와 군축을 주장한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있었을 따름이다.
이미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사민당은 「체제내정당」으로서 자기 위치를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경제정책면에서도 기민당의 노선과 별다른 차이가 없을 줄안다. 「마르크」화의 평가절상문제는 하나의 굳어진 방향으로 생각된다. 영국의 EEC가입문제도 빠른 시일안에 실현의 가능성이 짙어졌다.
앞으로 변화가 있다며는 사민당의 기본적인 생각인 『국가재정은 하나의 상부구조인데 이것이 경제토대에 대해서 어떠한 반작용을 하느냐』는 문제를 다루는데 나타나리라고 생각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