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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영의 문화 트렌드] 무기력한 평화 박차고 싸우라니 … 좀 수상한 걸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31호 28면

일본의 세계적인 팝아티스트 무라카미 다카시는 자칭 오타쿠(매니어, 특히 성인만화·애니메이션 등 서브컬처의 매니어)다. “그렇다면 ‘진격의 거인’ 같은 요즘 만화도 보느냐”고 최근 전시를 위해 방한한 그에게 질문했다. 사실 ‘진격의 거인’은 그저 예로 든 것이었는데 그는 열띤 어조로 대답했다.

日 만화 ‘진격의 거인’ 신드롬

“우울한 만화다. 갑자기 출현한 거인들이 인간을 잡아먹는데 왜 그런지 아무도 모른다. 만화 자체가 독특하기도 하지만 일본에서 이 만화가 폭발적인 인기를 끈 것도 독특한 현상이다. 결국 이 만화가 일본 젊은 세대의 현실이라는 얘기다. 인간은 거인을 막기 위해 쌓아놓은 높은 장벽에 갇혀 무기력한 삶을 산다. 그 한정된 안전조차 언제 거인이 장벽을 허물고 쳐들어올지 모르는 공포와 공존한다.”

이 말을 들으니 ‘진격의 거인’이 한국 젊은 층 사이에서도 인기인 게 이해가 간다. 그들 역시 ‘장벽’에 둘러싸인 사회, ‘좋은 일자리’가 부족해 청년 실업이 증가하고 계층 상승이 어려워진 닫힌 사회에 살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북한의 도발 위협, 주변 강대국(※얄궂게도 ‘진격의 거인’이 나온 일본도 포함된다)과의 정치적 마찰 등도 보이지 않는 ‘장벽’과 ‘공포의 거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퍼시픽 림’의 한 장면.

인류는 태초부터 거인을 논해 왔다. 북유럽 신화에선 위미르라는 거인의 몸에서 세계가 창조되었고, 신들은 거인족과 끊임없이 투쟁한다. 여기서 거인은 거대한 자연의 무시무시한 힘을 상징한다. 이런 이유로 ‘진격의 거인’은 보편적으로 어필할 요소를 갖추고 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수많은 수작(秀作) 만화가 쏟아져 나오는 일본에서 유난히 인기를 끈 건 무라카미의 지적처럼 “독특한 현상”이다. 그래서 한국의 몇몇 전문가들은 최근 일본 정치권의 군국주의 부활 시도를 떠올리며 내심 우려한다.

‘진격의 거인’에서 주인공 에렌 예거는 장벽 안에 갇힌 무기력한 평화를 “가축의 삶”이라고 비난하며 “장벽 밖으로 나가 싸워야 한다”고 외친다. 이것이 지금 일본의 상황과 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국으로서 정식 군대 없이 미국의 방위 아래 지내왔다. 그런데 최근 아베 신조 정부가 헌법 개정 뒤 자위대를 정식 군대로 만들려는 움직임을 보여 주변국의 반발을 사고 있다.

물론 원작자가 이것을 의도했다는 증거는 없다. 또 이 만화는 앞서 말한 것처럼 다양한 함의로 세계인에게 어필할 수 있다. 그러니 군국주의 만화로 몰아 배척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일본의 특정 집단에 극우적 영감을 줄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하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일본 특유의 거대로봇 만화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우선, 거대로봇은 보편적으로 어필할 만하다. 인간은 태초부터 거인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스스로 거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첨단 테크놀로지의 시대에 인간이 가장 멋지게 거인이 되는 방법은 거대로봇을 타고 조종하는 것이리라.

일본적인 거대로봇은 할리우드로도 수입되었다. 이번 주말에 한국과 북미에서 개봉된 영화 ‘퍼시픽 림’도 그런 거대로봇이 거대 괴물과 싸우는 영화다. ‘트랜스포머’ 시리즈와 비교되곤 하지만 ‘퍼시픽 림’은 인간 파일럿이 로봇을 조종한다는 점에서 일본 거대로봇 만화에 훨씬 가깝다. 공교롭게도 이들 거대로봇은 ‘사냥꾼’을 뜻하는 예거(jaeger)라고 불린다. ‘진격의 거인’의 주인공 소년과 같은 이름이다.

‘퍼시픽 림’의 감독 길예르모 델 토로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전쟁을 미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걸 피하려고” 일부러 등장인물에게 군대식 계급 명칭을 붙이지 않았다고 했다. 이 말은 거대로봇 영화가 상당히 군국주의적으로 보일 수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간 일본 거대로봇 만화 담론이 벌어질 때 군국주의 논쟁이 나오곤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진격의 거인’이든 거대로봇이든 작품 자체를 일부러 매도할 필요는 없다. 좋은 작품은 한국인도 향유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지는지-최근 우경화 일본에서 어떤 맥락으로 인기를 얻는지-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일본 군국주의의 최대 피해자였던 한국은 늘 깨어 있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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