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르시 찬반세력 공동의 적이 된 미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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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미국이 군부 쿠데타로 축출된 무함마드 무르시 이집트 전 대통령의 찬반 세력에 공적이 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가 무르시 축출 인정 여부를 두고 명확한 입장 표명을 미루자 미국 내에선 찬반 공방이 치열해졌다. 지난 40년간 이집트와의 우호를 기반으로 중동을 관리해 온 미국이 진퇴양난의 기로에 선 셈이다.

 7일 저녁(현지시간) 이집트 카이로 중심부의 타흐리르광장에선 무르시 축출 축하집회가 열렸다. 수십만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이집트군은 전투기를 동원해 에어쇼까지 펼치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하지만 이날 집회는 흡사 반미 시위를 연상케 했다. 참가자들 상당수가 오바마의 얼굴이 담긴 포스터를 들고 나왔다. 얼굴 위엔 영어와 아랍어로 ‘패배자’란 글씨가 씌어 있었다. 오바마 정부가 무르시를 축출한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데 대한 비난이었다. 오바마의 턱에 오사마 빈 라덴의 수염을 그려 넣은 포스터와 “미국은 이집트가 탈레반이 지배하는 이슬람 국가가 되길 바란다”는 주장도 나왔다.

 친무르시 세력이 미국을 보는 시선도 곱지 않다. 미국이 겉으론 무르시 축출을 비난하는 모양새를 취하면서도 무르시 진영의 투항을 종용하는 이중 플레이를 편다고 의심한다. 친무르시 세력의 핵심인 무슬림형제단 관계자는 “미 외교관들이 형제단 지도자들을 만나 쿠데타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임시정부 체제하의 정치 일정에 참여토록 요구했다”고 뉴욕타임스(NYT)에 전했다. 또 연금 상태에 있는 무르시에게 한 아랍 국가 외무장관을 미 정부의 밀사로 보내 군부와 대치를 중단하라고 설득했다고 7일 무르시의 보좌관이 주장했다.

 친무르시 진영은 군부 쿠데타도 미국의 사주나 동의 아래 일으킨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NYT는 “미국의 청신호 없이 쿠데타를 진행할 수 있다고 믿는 이는 아무도 없다”는 무르시 측근들의 말을 인용했다.

 무르시 축출 직후 군부를 비난했던 오바마 대통령은 현재 ‘미국은 이집트 내 어느 정파와도 관계를 맺지 않고 지원 역시 없다’는 입장이다. 다만 ‘쿠데타’란 표현은 줄곧 쓰지 않고 있다. 미 정부가 이집트 사태를 쿠데타로 규정하면 자국 법에 따라 매년 15억 달러에 달하는 대이집트 원조를 중단해야 한다.

 미국은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이후부터 이집트 정권와 우호관계를 유지해 왔다. 아랍의 맹주국인 이집트를 내세워 이란 등 반미 이슬람세력을 견제하며 그간 중동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다. 그런 미국이 ‘절차적 민주성’이란 명분과 ‘이집트 정권과의 우호를 통한 중동 장악력 유지’란 실익을 놓고 갈팡질팡하는 것이다. AFP통신은 “미 행정부가 악몽에 빠졌다”고 평했다.

이충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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