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중앙시평

노무현의 장사꾼 화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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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진국
논설주간

정상회담 대화록을 읽은 첫 느낌은 장사꾼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겠다고 악착같이 매달렸다. 비굴해 보이기까지 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선심이라도 쓰듯 콧대를 높였다.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노 대통령은 물건을 팔아야 하는, 북한 경제를 개방하고 싶은 ‘을(乙)’이지만 가진 것이 많은 부자 상인이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침을 튀기며 설득했다. 김 위원장은 ‘갑(甲)질’을 했지만 사실은 쥐뿔도 없어 빚을 낼 수밖에 없는 가난한 구매자가 아닌가.

 노 대통령에게도 지나친 점이 없지 않았다. 흥정에 정신 팔려 듣기 좋은 말로 북 체제를 찬양하는 듯한 인상까지 줬다. 임기 말 떨이로 넘기느라 이것저것 다 덤으로 얹어주겠다고 약속했다. 방문 성과를 부풀리려고, 임기 중에 무언가를 만들어내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다음 대통령이 뒤집을 수 없게 대못을 박아놓으려 한 것도 지나친 욕심이다. 그러나 내 느낌은 그 정도다. ‘반역’의 냄새는 맡을 수 없다.

 일부에서는 노 대통령이 북방한계선(NLL)을 포기했다고 분개한다. 그 지적을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노무현-김정일, 두 사람은 NLL 위에 ‘서해 평화협력지대’를 만들자고 의견을 모았다. 이 합의가 실현된다면 군사대치선 위에 공동어로구역이 들어서게 돼 NLL이 사실상 사라지게 될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것을 영해를 넘겨준 반역으로 해석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노 대통령은 NLL을 폄훼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그렇지만 평화수역 설치에 동의를 받아내기 위해 약장수처럼 ‘상인적 표현’을 쏟아냈다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 거칠고 품격을 지키지 못한 말투, 그건 우리가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뽑을 때 이미 각오했던 일 아닌가. 북한이 노 대통령의 발언을 NLL 무효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억지 부리지 마라”고 반박할 것이다.

 서해평화협력지대 설치에 대해서는 찬반이 갈릴 수 있다. 특히 안보를 걱정하는 분들은 펄쩍 뛸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에 공동어로구역 설치는 상당히 논의가 이루어졌던 문제다. 개성공단을 만들 때 북한 군부도 비슷한 이유로 극력 반대했었다. 그렇다고 개성공단을 설치한 것을 두고 북한이 휴전선을 포기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군다나 대화록을 보면 서해평화협력지대 구상이 한강에서 해주까지 이어지고 있다. 김정일 위원장은 북한 군부가 군사기지가 밀집한 해주를 공단으로 내주는 걸 강력히 반대했다고 말하면서도 노 대통령과의 논의가 진전되자 해주까지 내놓을 듯이 말한다. 구체적인 구상은 총리회담이나 장관회담으로 넘겼지만 NLL만 일방적으로 포기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어렵다. 어떻게 해석하건 이제 와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마침 워싱턴 출장 중에 인터넷에서 공개된 대화록을 읽으며 큰 길 한가운데서 발가벗겨진 듯한 수치심을 느꼈다. 우리끼리가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를 향해 옷과 체면과 신뢰를 모두 벗어버린 듯한…. 외교의 ‘원칙’은 알몸을 보여주는 원시적 솔직함이 아니다. ‘외교적 표현’이 완곡어법인 이유다. 비공개로 솔직하게 나눈 대화는 입을 다무는 게 외교의 신뢰고 ‘원칙’이다.

 비공개로 나눈 이야기까지 떠벌리는 사람과 누가 속 깊은 대화를 나누려 하겠는가. 정상만이 아니다. 정보기관끼리의 협조도 보안에 대한 신뢰도만큼 커질 수 있다. 기관의 ‘명예’를 보호한다며 음지가 아닌 양지로 뛰쳐나와 활개치는 정보기관을 믿고 중요한 정보를 넘겨줄 곳이 있을지 걱정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미·중 방문은 가십에 파묻혀 버렸다. 윤창중 전 대변인에 노 대통령의 NLL 발언에…. 지금 동북아는 큰 변혁기를 맞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덩치가 커진 중국의 역할에 맞춰 새로운 지역 안보 협력의 틀을 짜야 할 때다. 북한의 핵개발과 미사일 문제는 심각한 고비다. 박 대통령의 이번 방미, 방중이 주목을 받는 이유다. 이를 계기로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장기적인 전략을 짜내야 한다. 그런데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의 발언을 놓고 콩이야 팥이야 하고 있으니 기가 막힌 노릇이다. 여야가 모두 NLL을 엄중하게 지키겠다고 다짐한 마당에 당시 발언을 까발리는 게 무슨 도움이 되고, 무엇이 달라지는가.

 국회의 정치력은 바닥이 난 지 오래다. 속마음을 털어놓는 대화가 사라졌다. 서로 비밀을 지켜줄 신뢰도 없다. 말꼬리나 잡고 공방을 벌이는 ‘탁구공 정치’가 이제 외교·안보분야마저 오염시키고 있는 것이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명분에 매달린다. 많이 가진 사람이 더 유연하고 너그러워야 한다. 답답한 원칙론자보다 멀리 내다보고 큰 그림을 그리는 전략가가 아쉽다.

김진국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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