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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문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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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서울 을지로입구에서 청계천 복개도로를 따라 2백m 남짓 가다보면 오른쪽에 고색창연한 2층 기와집이 보인다. 집의 허위대며, 바람벽이며, 문짝등은 허슬하기 이를데없지만 기왓골하며 용마루는 꼿꼿한채 그대로이다. 강단이 있는 기와집이다. (중앙일보 지난3월1일자 「칼라의눈」의 사진참조)
육당 최남선씨는 1910년 바로 이집 사랑채에다 「광문회」라는 패를 걸었었다. 1910년이면 한일합병으로 나라가 망하던해 이다. 가을바람이 불자 육당은 불현듯이 이 간판을 달아놓은 것이다.
오늘 그광문회를 기억하고있는 사람은 몇이 안된다. 규정제1조엔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본회는 조선 구내의 문헌·도서중 중대하고 긴요한 자를 수집·편찬·개간하여 귀중한 문서를 보존, 전시함을 목적함』-.
광문회 첫사업은 동국통감과 열하일기·신자전등을 내는일이었고 여지승람·난중잡록·대동주옥같은 귀중본들을 차례로 발간 했다. 「한글대사전」의 어휘「카드」가 만들어진곳도 여기라고한다.
말하자면 광문회는 기울어진나라의 주춧돌을 찾고 다듬는일에 분망했다. 마치 폐사에서 한조각기왓장을 줍듯이 육당은 망한나라의 초토에서 보석같은 정신을 일깨우고 있었다.
광문회가 이무렵 지식인들의 사랑채가 된것은 두말할 나위없다. 그들은 여기서 세계의 신문들을 뒤적거리며 역사의 대세를 투시하였고, 나라없는 울적함을 달랬다. 광문회는 이쯤되면 벌써 육당 개인의 집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의 이름으로 보존하고 가꿀만한 민족정신의 「심벌」인 것이다.
오늘, 그러나 이 집은 헐리고 없다. 육당의 후손은 그 헐린 자리에서 기왓장 하나를 주워 들고 망연해 있다. 당국은 도시계획에 의해 후손과는 한마디 의논도 없이 이집을 허물어 버린 것이다. 비록 명의는 낯선 사람의 것일 망정, 역사의 후광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았다.
우리는 하찮은 문명의 여울을 타고 이처럼 모든 것을 짓밟아도되는 것인가. 실로정신적가치는, 그리고 역사의 광채는 하잘것 없는 것인가. 설령 그자리를 지키지는 못할 망정, 그 여광이라도 간수할 수 있는 방법은 있었을 것이다. 부서진 기왓장 하나를 들고 있는 그 마음은 얼마나 허망했겠는가. 『정신부재의 「불도저」』에 경멸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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