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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허동현 경희대 교수·한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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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조선 왕조가 종언을 고하던 무렵 뜻 있는 선비들은 두가지 길을 택했습니다. 하나는 의병을 일으켜 일본에 저항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숨어 살며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지키거나 자결해 지조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황현(黃玹.1855~1910)이 국망의 비보를 접하고 자결하며 남긴 시를 읽어보면 그들의 고뇌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새와 짐승은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찌푸리네, 무궁화 피는 세상은 이미 사라졌는가.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옛일을 회상하니, 인간 세상에 지식인 노릇이 정녕 어려워라. "

그가 어렵다고 토로한 지식인 노릇은 어떤 것일까요. 초야에 묻혀 살았던 그는 사실 국망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결할 만큼 왕조의 혜택을 입은 바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는 죽음을 택했는지, 그가 자식들에게 남긴 유서를 볼까요.

"나는 죽어야 할 의리는 없지만 다만 국가가 선비를 기른 지 5백년이 되어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도 난국에 죽지 않는다면 오히려 애통하지 않겠는가. 나는 위로 황천(皇天)이 내려준 아름다움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 평소에 독서한 바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기리 잠들고자 하니 진실로 통쾌한 줄 알겠다. "

그런데 황현을 비롯한 당시 선비들이 죽음으로 지키려 한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요. 혹시 양반들만의 세상은 아니었을까요. 내수외양(內修外攘).

그들은 서양을 막는 구체적인 방안-무기 개발이나 군사력 증강-을 강구하기보다는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펼치기만 하면 서양의 침략은 저절로 막을 수 있다고 보았지요.

이상적인 왕도정치란 양반만이 정치적.경제적 이익을 독점하는 세상, 남녀유별로 상징되듯 남성이 지배하는 세상은 아니었을까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평등과 인권 사상을 존중하는 오늘날 우리들이 그들과 생각을 같이 할 수는 없겠지요.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인간세계가 추구할 목표라고 여겼던 선비들은, 중국에 청조가 들어선 이후 이제 나라다운 문명국은 조선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소중화(小中華). 조선의 선비들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왕조를 도와준 명을 중화의 진정한 계승자로 보았기에 명 천자를 모시는 만동묘(萬東廟)를 복구하자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명나라를 흠모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외세 의존적이었던 개화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사대적(事大的)이었고, 더구나 명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도 않았으니 관념적이기까지 했습니다.

지구마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자기 문화만을 배타적으로 높이는 이들의 자존 의식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자문해봅시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 베고 누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안빈낙도(安貧樂道). 빈한함 속에서 도를 즐긴다는 선비들의 경제관은 검약을 미덕으로 삼는 질박한 자급자족의 경제체제에서 가능한 것이겠지요.

저는 개항 이후 한국이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주변부로 예속된 것이 숙명적인 과정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거북이가 토끼를 이기는 일이 우화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니까요. 해방 후 한국이 산업사회에 진입할 수 있었듯 개화기의 우리 선조들에게도 기회는 있지 않았을까요?

물론 겉으로 표방한 명분과는 달리 석유와 영토를 탐한 미국 우파나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빈 라덴과 의병 지도자들이 그들의 상대보다 도덕적이라 해서, 혹은 약자나 패자라는 이유로 그들의 잘못까지 모두 감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알라 혹은 공자와 맹자)만을 고집해 상대를 배척한다는 점에서, 또 신에 대한 믿음이나 사람들의 의지가 무기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는 전쟁관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자급자족 경제체제 유지와 지식인들의 권력 독점을 꿈꾼다는 점에서 시대착오적인 몽상가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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