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의처증 폭력' 가정이 무너진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7면

남편에게 맞아 다치거나 죽는 아내들이 늘고 있다.

사회적으로 여성에 대한 관심과 지위가 급상승하고 있지만, 가정에선 여전히 폭력의 대상인 것이다. 특히 가정 폭력의 원인 중 상당수는 의처증 때문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를 개방되는 성(性)풍조, 커지는 여성 지위와 활동영역, 전통적 가족관이 충돌하면서 오는 사회적 현상(형사정책연구원 최인섭 범죄동향연구실장)으로 보고 있다.

◇살인 부른 의처증들=지난 11일 오후 서울 구로구에 사는 李모(42.여)씨가 집 3층 베란다에서 떨어져 숨졌다. 평소 "큰딸이 내 자식이 아니다"고 의심했던 남편 金모(43.노동.구속)씨가 술에 취해 또 폭력을 휘두르자 이를 피해 뛰어내렸다.

남편의 의심은 부부의 혈액형이 B형(BO 타입)인데 큰딸이 O형이라는 데서 시작됐다. 金씨도 나중엔 BO 타입의 부모에게서 O형 자녀가 나올 수 있음을 알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과 딸의 머리카락 DNA 검사를 통해 친자 확인을 받는 등 의심을 계속한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9일 다른 남자와 전화를 하는 부인을 목졸라 죽인 육군 모부대 金모(55)준위도 마찬가지다. 그는 공중전화로 통화하는 부인의 모습에 격분해 말다툼을 하다 일을 저질렀다. 범행 후엔 시체를 부근에 있는 한 대학 캠퍼스에 갖다 버리기까지 했다. 그도 12일 살인 및 시체 유기 혐의로 구속됐다.

마음누리 신경정신과 정찬호 원장은 ▶여성들의 사회관계 확대▶IMF 이후 남편들이 갖게 된 경제적.사회적 고립감과 위기의식▶TV 등 미디어에서 계속되는 불륜 이야기 등이 아내에 대한 의심을 키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경찰청 여성계장 이성재 경정도 "성적으로 분방한 사회 분위기에 대한 남편들이 불안의식이 극단적인 폭력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서울 여성의 전화'가 최근 조사한 남편의 아내 구타 이유로 '아내의 외도'가 17.5%로 가장 많았다.

◇늘어나는 신고, 미흡한 처벌=1998년 가정폭력범죄 처벌 특례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가정폭력 상담 건수는 급증세다.

여성부에 따르면 전국가정폭력 상담소에 접수된 가정폭력 상담 건수는 99년 4만1천4백97건, 2000년 7만5천7백23건, 2001년 11만4천6백12건이다. 매년 50% 이상씩 늘어난다.

하지만 고소.고발 등을 통해 사법 처리로 이어진 것은 1~2%대에 불과했다. 경찰 관계자는 "사법처리의 실효성에 대한 아내들의 의심, 그리고 가정이 깨지는 데 대한 우려 때문에 사법 당국에의 신고 사례는 적다"고 설명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곽배희 소장은 "가정 폭력을 당해 경찰에 신고해도 '집안 일'이라며 그냥 돌려보내 폭력이 되풀이되는 경우도 많다"며 "가정 폭력도 처벌을 받아야 할 범죄행위라는 인식이 분명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윤혜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