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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에세이] 가장 맛있는 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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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4면

지난해 9월 업무차 출장을 가는 김에 런던과 파리에 며칠씩 머물며 휴가를 보내기로 했다. 그래서 개인 비용으로 아내까지 동반하고 떠났다.

런던에서는 첫째 날 오전에 대영 박물관을 둘러보고 오후에는 전형적인 영국식 정원이라는 위슬리 가든을 찾아보는 스케줄을 짰다. 밤에는 템스 강변의 식당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기로 했다.

둘째 날엔 런던의 테이트 미술관이 템즈강변의 화력발전소를 개축해 최근에 개관한 테이트 현대미술관(Tate Modern)을 찾아가 바넛 뉴먼의 특별전을 보기로 했다. 미술관에서 점심까지 한 후 유로스타 열차편으로 도버해협을 건너 파리로 출발할 계획이었다.

새롭게 단장한 대영 박물관은 언제나 변함없이 장중했고 특히 이집트와 고대 중동, 그리스의 유물들은 보는 이를 압도했다. 누군가 관람료를 받지 않는 대영 박물관의 전통을 칭송했다가 남의 나라 유물을 약탈해온 뒤 돈을 받고 관람시킨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며 핀잔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쨌거나 관람객의 입장에선 대영 박물관이 입장료를 받지 않는 점은 기분좋은 일이었다.

오후엔 예정대로 교외에 있는 위슬리 가든을 찾아갔다. 아름다운 정원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맑은 공기를 마음껏 즐긴 뒤 런던에 돌아온 우리는 어둠이 내린 템스 강변을 달려 타워 브리지 곁에 있는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 토니 블레어 총리와 저녁을 함께 한 곳으로 유명한 '르 퐁 드 라 투르(le pont de la Tour)' 레스토랑이다.

강가에 있는 야외의 자리에 앉은 우리는 주 요리로 혀넙치를 주문하고 와인은 그라브의 샤토 카르보니외(Cha.Carbonnieux)의 화이트 와인을 선택했다. 최근 대부분의 레스토랑에선 버건디 지방과 루아르 지방의 화이트 와인을 주로 비치하고 있는데 나는 굳이 샤토 카르보니외를 골라 주문한 것이다.

보르도의 그라브(Graves)에서도 다른 지역 못지않은 좋은 와인이 많이 생산된다. 메독 지역 이외의 와인으로선 유일하게 1855년에 제1급으로 지정된 샤토 오부리옹을 비롯해 질 좋은 레드 와인을 많이 만들어 낸다.

하지만 보르도의 다른 지역보다 화이트 와인의 생산비율이 월등히 높아 라비유 오부리옹을 비롯해 소비뇽 불랑종과 세미용종을 사용한 고급 화이트 와인이 많이 생산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샤토 카르보니외인데 12세기 이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카르보니외 화이트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세기 초 오스만 튀르크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주재했던 프랑스 외교관이 술탄에게 카르보니외의 화이트 와인을 광천수라고 말하며 진상했는데 이를 마신 술탄이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물이 다 있느냐고 감탄했다는 것이다.

그라브 지역에서도 메독 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실시해온 우수 와인 자격부여 제도를 1959년부터 실시하고 있다. 정부가 16개 샤토를 등급 구분없이 지정하고 있는데 샤토 카르보니외도 레드와 화이트 와인 모두 지정된 바 있다.

어둠이 짙게 깔린 템스강에는 찬란하게 불밝힌 선박들이 오르내리고 조명을 받은 타워 브리지와 강 건너 런던탑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오크통에서 숙성된 소비뇽 블랑 특유의 향긋함이 담겨진 황금색 와인이 참으로 매혹적이었던 템스 강변의 밤이었다.

김명호 한국은행 전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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