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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순의 어머니 조용필에 빠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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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진형준
홍익대 교수·불문과

의정부에서 열린 조용필 콘서트에 다녀왔다. 나도 조용필이 발산하는 열정과 매력에 열광하는 수만 관중의 하나가 되었다. 아내의 곁에서 흥을 발하시던 9순 노모도 그중의 하나이셨다.

 나는 무대 위의 조용필에게서도 감동을 받았지만 공연 내내 손에 쥔 빈 물병을 흔들며 흥겨워하시던 어머니에게서도 감동을 받았다. 어머니는 가끔 “공연이 두 시간이지? 이렇게 좋은 건 밤새라도 괜찮은데”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별로 건강 체질이 아니셨던 어머니가 이렇게 젊게 사실 수 있게 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몇 해 전 일이다. 텔레비전에서 남프랑스의 아비뇽이라는 도시를 소개하고 있었다. 아내와 함께 그 프로를 보고 계시던 어머니가 대뜸 말씀하셨다. “아범아, 우리 그때 저기 갔었지.” 그뿐이 아니었다. “그때 투우를 보려고 예약까지 했는데 비가 와서 취소되었었지”라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아내와 내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아내나 나나 그런 자세한 내용은 까맣게 잊고 있었건만 어머니는 다 기억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때’란 17년 전을 말한다. 프랑스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13박14일의 긴 자동차 여행을 하는 동안 어머니는 단 1분도 눈을 붙이지 않으셨다. 내내 호기심에 찬 눈으로 자동차 밖 달라진 풍경을 내다보시며 ‘아범아, 여기가 아직도 프랑스니?’라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그 호기심은 당신이 겪으신 모든 것을 ‘지나치는 풍경’에 머물게 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을 마음에 새겨 놓는다. 그렇다. 어머니의 기억은 머리에 들어 있지 않다. 그것은 마음에 새겨진 흔적이다.

 몇 해 전까지도 어머니는 분당에서 종로까지 버스로 교회를 다니셨다. 그런데 어머니는 계절 따라 노선이 다른 버스를 택하셨다. 계절 따라 보기 좋은 바깥 풍경이 다르다는 이유에서였다. 수없이 보아온 익숙한 풍경이지만 어머니는 그것을 매번 새로운 눈으로 보시고 즐길 줄 아신다. 봄철 꽃구경, 가을철 단풍 구경을 꼭 한 번씩은 시켜 드리려고 애를 쓰는 것도 모든 것을 새롭게 보고 즐기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도 덩달아 새로워지고 즐거워지기 때문이다.

 그렇다. 무엇보다 호기심이다. 그 호기심은 인간의 고유 속성이다. 인류의 선조들은 언덕에 올라 다른 곳에 언덕이 있는 것을 보면 그리로 기어가고 싶은 욕구를 느꼈고 수평선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 호기심을 느꼈다. 인류가 빠른 기간에 아프리카 요람으로부터 지구 전역으로 퍼져 나가게 된 것은 바로 그 호기심 덕분이다. 어머니의 호기심은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원초적 동력과 닿아 있다.

 어머니, 18년 전에 사랑하고 존경하시던 아버지를 저 세상으로 보내시고 무척 섧게 우셨지요. 아버지를 정말 사랑하셨기에 아버지를 떠나보내신 후의 어머니를 우리 네 형제 모두 무척 걱정했지요. 하지만 정작 걱정해야 할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우리들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지혜로워지시는 어머니에 비해 우리들은 여전히 어리석기만 했으니까요. 어머니, 어머니는 아들 넷 모두 ‘우리 어머니 정말 대단하시다’고 말하는 그런 분이랍니다. 손자, 손녀들까지 어릴 때부터 ‘우리 할머니랑은 말이 통해요’라고 말하는 그런 분이랍니다. 저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도 잘 하면 80세가 될 때까지 책을 쓸 수 있겠다’는 꿈을 꾸게 된답니다.

 그런 어머니가 얼마 전에 신문의 한 칼럼 이야기를 하셨지요. ‘아픈 장수(長壽)는 축복이 아니다’는 제목의 그 칼럼 내용이 구구절절이 옳다고 말씀하시면서 어머니는 아픈 몸으로 구차한 모습을 보이다가 돌아가시게 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하셨습니다. 어머니 조금도 걱정 마세요. 어머니가 어떤 식의 노년을 맞이하더라도 저희가 잘 모시겠다는 약속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에게는 절대로 그런 노년이 오지 않으리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지요. 어머니의 호기심이 요술 지팡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남루한 삶을 알록달록하게 만들고, 죽음조차도 숭고하게 만들 수 있는 그런 요술지팡이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그 호기심은 어머니가 맞이하시게 될 죽음조차 우리가 보고 배워야 할 아름답고 고결한 것으로 만들게 틀림없답니다. 그러니 어머니 아무 걱정 마시고, 남은 생을 늘 새롭게 만드세요.

어머니, 어머니의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진형준 홍익대 교수·불문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