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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랄한 기획, 날렵한 몸집 … 소규모 공연장이 대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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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국내 공연 인프라가 확충되고 있다. 2011년 전국의 공연장이 1000개를 넘은 이후 지역문화를 살리는 공연장에 방점이 찍히고 있다. 최근 3년간 서울 및 지방 대도시에서 새로 등록된 공연장 대부분은 작은 공연장이었다. 공연장 1000개 시대, 우리 공연문화의 오늘을 짚어봤다.


올 4월.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130석 규모의 LIG아트홀이 새로 문을 열었다. 같은 달 10일 시작된 개관 기념 공연은 ‘재즈 타임스’. 웅산 밴드를 필두로 이정식 섹스텟, 송영주 트리오 등 한국을 대표하는 재즈 뮤지션 열 팀이 무대에 올랐다. 침체기에 빠진 한국 재즈계에서 단비 같은 무대였다.

 같은 달 13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5분 거리에 페리지홀(200석)이 개관했다. 소규모 클래식 전용홀인 페리지홀 근처엔 서울바로크챔버홀(203석, 2010년 개관), 강남아트홀(140석, 2010년 개관) 등 클래식 전용홀이 자리잡고 있다.

관객도 “장르별 특화된 시설 선호”

강원도 강릉시의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잡은 작은공연장 단(端)의 전경. 교회를 리모델링한 건물이 인상적이다. 기획력만 있으면 지방에도 얼마든지 고급문화가 뿌리내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연장 왼쪽으로 보이는 게스트하우스는 관사를 개조한 것으로 침대와 주방을 둬 연주자들이 편하게 쉬어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강릉=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요즘 작은 공연장이 대세다. 일단 크게 짓고 보자는 ‘거대증후군’ 발상에서 벗어나고 있다. 특히 이런 트렌드는 대도시가 주도해 주목되고 있다. 2010~2012년 서울에서 신설된 공연장은 83개. 본지 조사 결과 이중 300석 이하 작은 공연장은 52개로 나타났다. 최근 3년 신설 공연장 중 절반 이상이 작은 공연장이었다.

 반대로 1000석이 넘는 대형 공연장은 디큐브아트센터(2011년), 블루스퀘어 뮤지컬 및 콘서트 공연장(2011년), 송파구 올림픽홀(2011년) 단 4곳에 그쳤다.

 다른 대도시도 사정은 엇비슷하다. 부산은 최근 3년간 신설된 공연장(12개) 중 하늘연극장 단 한 곳이 300석 이상 공연장이었다. 나머지는 70~200석 규모의 작은 극장으로 조사됐다. 대구·인천·대전도 신설 공연장 중 절반 이상이 300석 이하였다.

  전문가들은 작은 공연장을 모세혈관에 비유했다. 세종문화회관·예술의전당 등 대규모 공연장들이 1980~90년대 문화계를 이끌어온 동맥이었다면 작은 공연장은 문화 모세혈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2009년 서울 서초구에 화이트홀(230석)을 개관한 윤학 대표는 “공연장에선 인간의 냄새가 풍겨야 하는데 대리석으로 도배된 대규모 공연장에선 그런 분위기를 느끼기 힘들다”며 “오붓한 분위기에서 연주자와 얼굴을 맞댈 수 있다는 게 작은 공연장이 각광받는 이유”라고 말했다.

 관객들도 이런 추세를 환영하고 있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이 지난해 시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에서 응답자들은 대규모 공연시설(4.0%)보다 거주지 근처의 소규모 공연시설(36.5%)이나 장르별 특화된 공연장(27.9%)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체·지방에서 틈새 수요 공략

 대형 공연장이 포화에 도달했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이승엽 교수는 “문체부에서 추진한 ‘1지자체 1공연장’ 정책이 거의 마무리가 됐는데 서울과 수도권 등에선 아직도 공연장이 부족하다”며 “대규모 공연장들이 채우지 못하는 틈새를 작은 공연장이 메우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업들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LIG아트홀은 LIG 문화재단이 주도해서 만들었고, 페리지홀은 휴대전화 부품제조 업체의 사옥 지하에 마련됐다. 작은 공연장은 아니지만 롯데는 잠실 제2롯데월드에 2000석 규모의 클래식 전용홀을 추진 중이다.

 국립극장 안호상 극장장은 기업들의 공연장 진출을 와인 열풍에 비유했다. 그는 “LG아트센터를 필두로 삼성(블루스퀘어 공연장) 등 대기업은 물론이고 중소기업도 공연장 짓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며 “너도나도 와인셀러를 집에 들여 놓았던 것처럼 최근 기업들 사이에선 공연장을 갖는 게 하나의 유행처럼 자리잡았다”고 했다.

  작은 공연장의 성공 사례도 들린다. 강릉시 남대천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단(端)’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7월 문을 연 단은 최초라는 뜻처럼 여느 공연장과 다른 풍경이다. 1950년대 세워진 작은 교회를 리모델링한 건물(150석)에 직원은 두 명이 전부다. 기획운영을 맡고 있는 백현태씨와 시설관리를 맡고 있는 박성민씨다.

 단은 재즈·클래식 등 순수예술 공연에 집중하고 있다. 3월에는 김책 재즈 트리오가, 4월에는 콰르텟 그리오가 공연했다. 25일에는 안데스 민속음악 전문 공연단 가우사이가 공연한다.

 일종의 틈새전략으로 시민들의 반응도 뜨겁다. 공연마다 유료 객석 점유율이 70%에 이를 정도다. 인근 교동엔 강릉시문화예술관 대공연장(450석)이 있지만 지역 행사나 어린이 인형극 정도로 사용됐다. 클래식 등의 순수예술 공연이 열리기도 했지만 객석 절반을 채우기도 힘들 정도였다. 작곡을 전공한 백씨는 “지방 소도시에도 재즈·클래식 등 순수예술에 대한 수요는 있다. 마니아층을 공략하고 있다”고 말했다.

해운대 문화회관, 오페라도 자체 기획

 부산 해운대 문화회관은 2007년 개관부터 초대권을 없앴다. 대신 티켓을 할인해 주는 정기 회원을 늘리는데 집중했다. 공연 비수기인 1, 2월에는 ‘3D와 함께하는 세계명화 체험전’ 등 기획전시를 열어 회원들을 공연장으로 끌어들이며 기획공연의 비율을 40% 수준으로 높였다. 1500명의 정기 회원이 밑바탕이 됐다.

 올 9월에는 오페라 ‘해운대’도 선보인다. 지자체 문화회관이 자체 기획으로 제작하는 첫 오페라로 1억원 정도가 투입될 예정이다. 무모한 도전처럼 보이지만 김성모 공연감독의 의견은 다르다.

그는 “지방 문화회관의 성장 동력은 결국 자체 기획력에 달려 있다. 개관 당시만 해도 연주자에 대한 정보가 전무해 맨땅에 헤딩을 했지만 지금은 데이터베이스가 축적된 까닭에 큰 무리 없이 오페라를 제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글=강기헌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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