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물값과 단전 순서 … 원칙은 지켜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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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돌발 변수로 인해 사회 분위기가 한쪽으로 쏠리면서 꼭 지켜야 할 원칙마저 흔들리는 조짐이다. 대표적 사례가 물값과 단전(斷電) 순서다. 서승환 국토교통부 장관은 “친수사업만으로 수자원공사(수공)의 부채 절감에 한계가 있어 물값 조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적절치 못한 언급이다. 4대 강 사업으로 인한 수공의 부채와 물값 인상을 뒤섞는 바람에 쓸데없는 오해를 불렀다. 야당이 “이명박 정부가 저지른 일에 왜 국민의 호주머니를 터느냐”고 반발하는 건 당연하다.

 수도요금 인상과 수공의 부채는 분리해야 한다. 2008년 1조9000억원이던 수공의 빚은 4대 강 사업이 끝난 뒤 13조7000억원으로 급증했다. 이명박 정부가 4대 강 사업비의 상당 부분을 수공의 차입을 통해 조달하는 꼼수를 썼기 때문이다. 친수사업 따위의 편법으로는 도저히 벌충할 수 없는 부채 규모다. 매년 이자를 갚기도 벅찰 정도다. 따라서 수공의 부채는 지금부터라도 단계적으로 재정을 투입해 갚아나가는 게 맞다. 주무부처 장관이 물값을 올려 수공의 부채를 갚겠다는 땜질식 처방을 거론한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

 하지만 물값 인상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우리의 1인당 하루 물 사용량은 333L로 덴마크(114L)나 독일(151L)보다 훨씬 많다. 흥청망청 물을 낭비하며, 매년 누수로 빠져나가는 수돗물만 6억t이 넘는다. 이에 대해 글렌 다이거 국제물협회 회장은 “한국의 물값이 터무니없이 싸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한국의 1㎥당 수도 요금은 610원으로 미국(1377원)·일본(1580원)·독일(3550원)보다 훨씬 싸다. 공공요금 억제로 원가 이하로 공급되는 경우도 흔하다. 따라서 중장기적으로 물값은 올려야 한다. 이렇게 조달한 재원은 수공의 빚잔치가 아니라 노후 수도관 개량을 통해 수돗물 신뢰 확보에 집중 투입하는 게 원칙이다.

 최근 논란에 휩싸인 단전 순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의 납품 비리로 인해 언제 블랙아웃(대규모 정전)이 발생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만약 순환 단전이라도 할 경우 아파트·주택·상가→산업용→정전 민감 시설 순으로 전기를 끊는 것을 놓고 원성이 높다. “잘못은 한수원이 해놓고 왜 주택부터 피해를 보느냐”는 것이다. 그나마 이런 국민적 비난에도 불구하고 새누리당과 정부가 현행 원칙을 지키기로 한 것은 다행이다. 최악의 상황을 맞더라도 사회 전체의 피해를 최소화시키는 게 맞다. 아무리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멈춰서는 불편을 겪더라도 양식장이나 양계장 등 정전 민감 시설의 물고기나 닭이 떼죽음당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그렇다고 정부와 공기업이 슬그머니 책임을 덮고 넘어가려 해선 안 된다. 물값은 올리되, 4대 강 사업에 비리가 있다면 철저히 추궁해야 한다. 단전 순서는 지키되, 한수원의 납품 비리는 끝까지 추적해 단죄해야 할 것이다. 필요하면 국정조사와 청문회를 열겠다는 각오도 밝혀야 한다. 이런 강력한 후속조치를 통해 우리 사회를 납득시켜야 국민적 불만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 자칫 원칙마저 흔들려 더 큰 참화를 자초하는 것은 반드시 피해야 할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