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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살았으면(1) 가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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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오늘-흔히 사람의 길이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 자칫하면 인간을 상실케 된다고도 한다. 곧은 길이 훤하게 튀고, 높은 건물이. 공장이 솟아 우리살림의 물질적 바탕은 한 해가 다르게 나아져도 이 바탕의 주인은 점점 더 못해 간다는 소리도 들린다. 물살 빠른 시대적 조류에 휩쓸려 급격스런 주위환경의 변동은 가치관을 뒤흔들고 사회에서의 내부적 모순을 낳았다. 가정에서, 학원에서 또 직장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되찾아야하나, 우리가 선 자리는 어디며 새「모럴」은 어떻게 찾아야 하나 가늠하여 본다.
『이세상 여려 남편들에게! …술 한잔 참으시고 가정마다 이런 불행이 부디 없기를 빕니다. 「가정에 충실한 남편」「알뜰한 아기 아빠」가 되시기를 부탁합니다.』
신남숙여인(35·부산시괴정동)은 5남매의 목을 차례로 졸라 죽이고 이같은 유서를 남겼다. 결혼생활16년, 그동안 남편 박주호씨(42)는 술통에 빠져 있거나 춤바람에 들아 있었다. 아내는 이제 남편을 남편으로 섬길 수 없었고 꼬마들도 정다운 아빠로는 생각지 않았다. 아내는 꼬마들과 함께 자살함으로써 남편의 불성실에 항의했던 것이다 (66년12윌7일).
최대연씨(51·서울성동구신사동)는 아내 (이상연·43)를 때려죽이고 시체를 한강 백사장에 남몰래 버렸다가 경찰에 잡혔다(지난9일).『아내가 독점해 버려 남편구실을 할 수 없었고 아이들에게도 애비 구실을 할 수 없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연이 살해동기. 국가의 기초가 사회라면 사회의 기본단위는 가정이다
이 가정을 이끌어 나가는 중심이 부부인데 믿지 못하겠다는 장벽이 가로막힐 때 어린이들의 생명을 잔인하게 끊는 비극이 따랐다. 신여인은 이 비극을 자신이 연출(?)하면서 세상의 모든 남편들을 불신하는 하나의 역설을 유서에 담아 호소했다. 최씨는 아내와의 사이에 이해와 관용, 양보의 다리를 마련치 못해 스스로 큰 비극을 만들었다.
B여고 3년 김숙자양(18가명)등 어린 5남매는 엄마 (이정옥·43)의 22가지 불륜을 또박또박 적은 진정서를 서울서대문경찰서장에게 보냈다 (작년10윌 초순).
아빠가 육군대령으로 부산과 원주에 근무할 때 아빠를 의심하더니 15세나 손아래인 김모(27)란 청년과 물건을 갖고 줄행랑을 쳤으니 처벌해 달라는 것. 황옥순양 (17·가명) 은 어머니(공명자·40·영등포구구로동)가 술만 마시고 외박이 잦아 엄마노릇을 하지 않는데 항의,『우리 3남매를 아빠 무덤 옆에 합장해 주셔요』란 유서를 남기고 집단 자살했다(66년12월5일).
박우일군(18·가명)은 진학을 만류하는 아버지(박희두·48·영동군심천면)를 도끼로 찍어 죽였고(작년1월16일) 정지숙양(17·가명)도 연애를 방해한다고 어머니(손길례·48·나주군다도면)를 독살했다. 김용배군 (22) 은 부모를 돌보지 않는 맏형(김준배·33·영등포구신정동)을 과도로 찔러 형은 중태에 빠지고 형수(김갑순·34)는 죽었다. 이상철씨(27·종로구윈서동)도 형수가 자기 어머니를 때리고 학대했다고 형수(조숙형·35)를「재크·나이프」로 7번이나 찔렀다.
어린 남매가 바람난 엄마를 고발하고 연애를 못하게 한다고 엄마를 독살하는 부모와 자식간의 비정과 불신….형제사이의 이해부족과 고부간의 불화로 칼부림이란 비참한 종말을 몰아온 것.
『아빠, 일찍 돌아오셔요』란「피킷」을 들고 엄마들과 꼬마들이 거리에 나선 것도 아빠를 불신하고 있는 까닭이 아닐까. 가정의 날「캠페인」도 부부와 부모와 꼬마들 사이에 불신을 씻고 간격을 좁혀 화목한 가정을 이루자는 것이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가정의 날」엔 아빠를 집으로 일찍 모셔들여 화목과 단란을 이루겠다는 엄마들과 꼬마들의 소박한 소망이 가득 담겨있다. 가족사이의 불신이 가정에 비극을 몰아오는 것이라면 믿음으로 맺어진 가정엔 행복이 찾아든다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이치. 그래서「바람난 아빠, 집에 모셔오기 운동은 모든 사람에게 공감을 일으키고 모범가정이 뭇 사람의 선망의 표적이 됐다.
68연도 국전에서 동양화「6월」로 국무총리 상을 탄 이완수(32)부부는 믿음으로 이 영광을 차지한 단란한 가정. 소아마비로 불인한 이씨와 4년전 결혼한 아내 윤영자씨(29)의 남편을 향한 이해와 믿음이 없었던들 그날의 영예가 없었겠다고 들 했다. 남편 이씨는 아내의 사랑으로 인해 『나는 이제 불구자가 아니다』고 외칠 수 있었다. 김부임여인(48)도 남편이 실직하자 8년 동안 구멍가게로 푼푼이 저축, 남편을 자동차부속상 주인으로 앉혀 바람직한 가정을 이루었다.
서울대문리대 하상락 교수는『오늘의 우리가정은 낡은 의리와 윤리, 형식으로 묶여 있다가 새로운 풍조인 사랑과 자유를 받아 들여 가부장제가 무너져 가는 과도기』라고 말한다.『이 과도기를 올바로 극복해야한다』고 주장한 하교수는『가족성원 사이의 사랑으로 맺어진 유대와 남을 부러워하지 않고 자기위치를 지킬 줄 아는 이해』가 건전한 가정을 이루는 지름길』이라고 진단한다.
여성문제연구소장이며 이대교수 이태영 여사는『가정이란 부부를 기초로 일생을 살아갈 공동생활의 단위』라고 정의,『부부가 서로 이해하고 인격을 존중할 때 모범가정 일 수 있다』고 말한다. 또 이여사는『우리네 가정은 아직은 노후 사후보장이 확립되지 않아 대가족제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부부와 존비속간의 믿음과 이해에 화목을 걸 수밖에 없을 것 』이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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