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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안보지원 구체화|호눌룰루 한미정상회담>
연초의 북괴무장공비 서울침입사건, 미국정보함「푸에블로」호 납북사건에서 최근의 삼척·울진 무장공비사건으로 이어지는 북괴의 계속된 무력도발행위는 한국내의 안보체제를 다듬는 계기를 마련했다.
1·21 사태이후 한국외교의 기조는「안보」에 바탕을 두어왔고 4월17·18일 박·「존슨」한미 두나라 정상의「호놀룰루」회담은 이를 상징적으로 대변했다.
외침의 경우 미군의『즉각 출병』을 보장받기위한 한미방위조약의 개정과 「유엔」군작전권의 이양문제로 집약된 대미안보외교는 박·「존슨」회담으로 일단 매듭이 지어졌다. 양국대통령은 이틀간의 회담을 마친뒤 공동성명을 통해 『양국정부는 한미상호방위조약에따라 외부위협에 대처하기 위하여 취할 행동을 즉각적으로 결정할 것에 합의했다』고 공동의 안보결의를 다짐했다.
이는 정부가 1·21사태이후 줄곧 주장해오던『북괴도발행위에대한 보복조치』를 미측이 원칙적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되고있으며 이를 계기로 국군의 전력증강과함께 방위산업육성, 대간첩강비강화, 예비군의 무장및 집단안보기구창설등 한국의 안보태세강화책이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겨 지고있다.

<큰영향력에 촛점|한일 협력위원회>
한일양국 정·재계실력자들로 구성된 거대한 민간단체가 한일협력위원회라는 이름으로 11월13일 서울에서 발기됐다.
69년2월10일 일본동경에서 창립총회겸 제1차연차총회를 가질 한국협력위원회는 두나라의 민간실력자 각50명을 회원으로하고 앞으로 두나라 정부간의 교섭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풀어나갈것으로 기대되고있어 주목을 끌었다.
위원회규약은『한일양국간의 정치·경제·문화등 여러문제에 대해 친선협력을 도모한다』고 그목적을 밝히고 서울과 동경에 상설사무국을 두어 상임위별로 두나라의 협력사항을 구체적으로 검토, 실시키로 했다.
위원회의 구체적 활동은 안보문제에서 경제협력까지 모든 문제를 포괄하고있으나『우리입장에서는 경제협력문제가 곧정치 문제』라고하는 한국측 산파역들의 말로 미루어 경제문제에 치중될 전망이 짙다.
한국협력위원회는 그의 방대한 영향력과 성격으로 보아 기존의 한일양국의 잡다한 민간협력단체를 흡수하게 될것 같고 양국정부에 대한 압력단체의 역할을 넘어 이단체가 정부의 정책을 앞지를 가능성도 엿보인다.

<반쯤 걷힌「안개」|제2의 의정서처리협상>
6·8선거부정논의는 1년 내내 정국에 깔려있던 뿌연 안개-. 11월말부터 벌어진 여야협상은 이 안개를 반쯤 걷어놓고 해를 넘긴다.
이른바 8인회담. 공화·신민양당의 실력자 여덟사람은 10차에걸친 연30시간의 절충끝에 선거법개정등 보장법안의 연내처리·선거구조정·지방자치제의 단계적실시·대통령·국회의원선거의 동시실시 원칙에 합의했다.
선거 부정을 시정한다는「특조위」구성문제는 이 굵직한 합의에 밀려났다. 그때문에 신민당은 전진오총재의 의원직사퇴결심과 일부 원외세력의 반발로 또한번 홍역을 겪어야했다.
어쩌면 신민당은 이 홍역을 불가피한것으로 제쳐놓고 협상을 끌어갔을지도 모르며 공화당은 야당의 통증을 최소한으로 줄이기에 애썼을 것같다.
공화당이 결코 응하지 않을것같던 동시선거문제는 『정치풍토개선을 위한 제도를 마련하자』는 조건아래 양해가 되었는데 그「조건」은 보기에 따라「원칙」보다더 어렵고 중요한 문제.
신민당은 그「조건」의 해결을 헌법의 테두리에서 모색하자는 것이고 공화당은 개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입장. 내년까지 이어갈 8인회담은 71년을 내다보는 고차원의 흥정을 벌일것이 틀림없다.

<협의서 실천으로|「아스팍」 각료회의>
「닉슨」씨가 미국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부터 「아시아」의 새로운 안보체제형성이 논의되었다. 혹은 「아스팍」(아시아태평양이사회)의 군사동맹화론, 혹은 북대서양동맹과같은 새조약기구를 만들자는 얘기도 나왔다. 그「아스팍」은『「아시아」의 문제를「아시아」인의 손으로』라는 구호아래 한국의 주도로 만들어진 것.
이 그「아스팍」은 군맹화논의가 본격화되기전인 7월말 호주「캔버라」에서 3차회의를 가졌다.
이회의는 22개항의 공동성명을 통해 이지역 전체의 안보문체에 관심을 표명하고 반공색채를 짙게함으로써 그「아스팍」의 성격을 보다 선명히했다.
3차각료회담은 그「아스팍」사회문화「센터」를 한국에 설치하는 협정에 서명하여 이에따라 서울에는 처음으로 국제기구가 설치되었다.
무역자유화, 지불협정체결등 지역적경제협력방안도 연구키로하여 이기구는 단순한 협의기구에서 실천기구로 걸음을 내디디었다.
그러나 군장제정문제는 그전단계로 강령을 채택하는데에 머물렀고 더구나 문호개방원칙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아스팍」은 그자체만의 군맹화에 적지않은 제약을 갖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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