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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인생, 결국 아무 것도 아니었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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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호 28면

오노레 드 발자크(1799~1850, Honoré de Bal)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나폴레옹 초상화 밑에 “그가 칼로 이루지 못한 일을 나는 펜으로 이루리라”라고 써놓고 초인적인 능력으로 작품을 잇따라 내놓았다. 18년간 사랑했던 한스카 부인과 결혼한 지 5개월 만에 눈을 감았다.

연어는 산란 후에 갑자기 늙어버린다. 대양을 질주해온 힘차고 민첩했던 자태가 처참한 몰골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그 곱던 은빛은 다 사라지고 검버섯처럼 군데군데 반점이 피어난다. 몸에서 기름기가 빠져나가고 단단했던 등 근육은 물렁물렁해진다. 다홍색 속살도 허옇게 변하고 푸석푸석해진 몸뚱이는 물살에 떠밀려간다. 연어의 이런 변신은 수컷에게서 더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씨를 남겨야 하는 숙명에서는 부성(父性)이 더 절실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박정태의 고전 속 불멸의 문장과 작가 <38>『고리오 영감』과 오노레 드 발자크

집착에 가까운 지독한 부성애. 고리오 영감이 딱 이랬다. 오노레 드 발자크는 『고리오 영감(Le Père Goriot)』의 창작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선량한 사나이, 하숙집, 600프랑의 연금, 5만 프랑의 연금을 가진 딸들을 위해 스스로 빈털터리가 된 남자, 개 같은 죽음’.

프랑스 대혁명기에 제분업으로 큰돈을 번 그는 두 딸을 거액의 지참금과 함께 시집 보낸다. 그래서 큰딸은 대귀족 가문의 백작부인으로, 작은딸은 은행가를 남편으로 둔 남작부인으로 만든다.
“나는 40년 동안 일했어. 등에 짐 지고 다니며 땀을 소나기처럼 흘렸지. 천사 같은 너희들을 위해 나는 일생 동안 궁핍했고 아무리 벅찬 일과 무거운 짐조차도 가볍게 생각했어. 돈이 바로 인생이야.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하지만 그는 얼마 안 되는 연금에 의지해 허름한 하숙집으로 들어간다. 그의 유일한 즐거움은 딸들을 만나는 것이다. 그러나 신분 차이로 인해 사위가 있을 때는 딸 집에 갈 수도 없다. 게다가 허영과 사치에 물든 딸들의 빚을 갚아주느라 자신의 연금까지 저당 잡히지만, 큰딸은 10만 프랑을 더 달라고 찾아온다.

“도둑질하지 않고서는 그 돈을 만들 수 없다. 그러나 도둑질이라도 할 테다. 너희들의 고통을 내가 대신 받아서 아팠으면 좋으련만. 아! 어렸을 때 너희들은 참 행복했는데.” 결국 고리오 영감은 자신의 장례 치를 돈조차 없이 죽어가고, 두 딸은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기는커녕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는다.

고리오 영감은 마지막 순간 자신을 간호해 주는 하숙집 학생 라스티냐크에게 절규하듯 말한다. “나는 항의하네! 아버지가 짓밟히면 나라가 망하는 거야. 이 사회는 부성애를 기초로 해서 굴러가는 법이지. 자식들이 아비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모든 건 무너지고 말 거야. 아비가 딸들을 보려고 숨어 있다니! 나는 그 애들에게 내 생명을 다 주었지만, 딸애들은 오늘 나에게 단 한 시간도 안 주는군!”

그러고는 결혼도 하지 말고 자식도 낳지 말라고 외친다. “자넨 자식들에게 생명을 주지만, 그 애들은 자네에게 죽음을 줄 거야.” 라스티냐크는 자신의 돈으로 고리오 영감의 장례식을 치른 뒤 그의 무덤에 청춘의 마지막 눈물을 묻는다.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다.”

이 작품은 고리오 영감의 죽음과 함께 끝나지만, 사실 진짜 주인공은 라스티냐크다. 그의 관찰을 통해 고리오 영감의 부성애가 드러나고, 고리오 영감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도 완성되기 때문이다. 라스티냐크는 당연히 발자크의 분신이고, 그의 야심은 발자크의 속내이기도 하다.

파리로 압축되는 이 세상은 돈과 쾌락을 추구하는 허위와 허영으로 가득한 세계며, 강자가 약자를 짓밟고 화려하게 치장한 악덕이 성공이라 불리는 곳이다. 같은 하숙집에 사는 보트랭은 하루빨리 성공하고 싶어하는 라스티냐크를 꿰뚫어보고 이렇게 말해준다. 이 사회는 세상의 추악한 법칙을 이용해 성공하는 강자와 그 법칙을 몰라서 실패하는 약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따라서 “야심을 좇기 위해서는 꺼림칙한 일도 해치울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발자크는 자신의 작품 전부를 『인간희극』이라는 제목 아래 하나로 통합하려는 생각을 품었다. 그는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프랑스 사회가 역사가가 되고 나는 단지 한 사람의 서기가 되는 거야. 악덕과 미덕의 총목록을 짠 다음, 인간의 열정 가운데 주된 것들을 모아 인물들에게 색깔을 입히고 주요 사건들을 추려 여러 인간 유형들을 연결시키면, 그 숱한 역사가들로부터 외면당해온 역사, 이를테면 풍속의 역사를 써낼 수 있어.”

발자크는 『인간희극』으로 91편의 장단편 소설을 썼고, 『고리오 영감』도 그중 하나다. 『인간희극』에는 무려 2000명이 넘는 인물이 나오고 또 재등장하는데, 가장 궁금한 건 라스티냐크의 그 뒤 운명이다. 그는 고리오 영감의 작은딸인 남작부인의 도움을 받아 출세 가도를 달리며 장관직에까지 오르고, 남작부인의 딸과 결혼해 엄청난 재산을 모은다. 그가 품었던 야심대로라면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하숙생 시절의 순수했던 열정은 사라지고 욕망으로 가득 찬 늙고 황량한 모습만 남아 살롱을 헤맨다. 겉은 화려해졌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악덕이 소용돌이치는 이 세상과 싸움을 벌였던 것일까? 연어가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다 쏟아 붓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은 것 아닐까. 고단한 인생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박정태씨는 고려대 경제학과를 나와 서울경제신문, 한국일보 기자를 지냈다. 출판사 굿모닝북스 대표이며 북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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