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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거짓말하는 가족 때문에 속상하다는 40대 직장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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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중반의 직장인 남성입니다. 중학생 딸과 초등생 아들을 하나씩 두고 있습니다. 너무 속상해 메일을 보냅니다. 바로 우리 가족 사이에 벌어지는 뻔한 거짓말에 관한 겁니다. 남들끼리는 몰라도 가족 간에는 거짓말을 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우리 집 식구들은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합니다. 아내는 옷을 좋아합니다. 세일 때 싼 옷만 사 입는 아내에게 늘 미안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지금까지 옷 가격에서 0 하나씩 빼고 저한테 이야기한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어떻게 그렇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느냐”고 화를 냈더니 답이 더 기막힙니다. “당신은 술, 담배 끊는다는 게 몇 년째냐”는 겁니다. 또 “일찍 들어온다고 하고는 아예 아침에 일찍 들어온 적도 있지 않느냐”며 옛날 잘못을 다 끄집어내 몰아세우는데 정말 미쳐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중학생 딸도 살짝살짝 거짓말하는 게 보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 아들조차 학원 간다고 하고는 친구들과 영화 보러 갔다 걸린 적도 있죠. 우리 가정이 엉망이란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하면 거짓말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거짓말은 나쁘고, 그렇기에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하죠. 이건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교육받는 기본적인 내용 중 하나입니다. 진실한 사람에게 가치를 부여하고 거짓말쟁이는 때론 가혹할 정도로 평가절하합니다. 존경받던 이들이 거짓말 하나로 바닥까지 추락하는 일은 학력 위조의 경우처럼 우리가 흔히 접하는 내용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그리고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거짓말은 물론 옳지 않습니다.

 “난 태어나서 거짓말한 적이 없어”라거나 “내가 거짓말을 잘 못해서 그런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실제로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일 겁니다. 그러나 이런 말 또한 ‘뻥’입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거짓말을 안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피해를 주는 빨간 거짓말은 범죄 행위입니다. 하지만 하얀 거짓말은 다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부드럽게 유지하기 위해 하얀 거짓말이라는 커뮤니케이션(소통) 전략을 본능적으로 활용하는 거니까요.

 거짓말은 비밀을 지키는 활동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산다는 건 비밀이 없다는 것인데 심리학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점잖고 세련되게 우리 모습을 다듬고 가공해서 남에게 보여줍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에티켓이고 삶의 예의입니다. 여기다 대고 “순도 100%의, 거짓이라고는 없는 완벽한 진실이냐”고 강박적으로 묻는다면 세상에 남아나는 세련됨이나 점잖음은 없을 겁니다. 인간은 무의식이 존재하고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욕망하기 때문입니다.

 욕망은 세련되지 않습니다. 매우 이기적이고 공격적이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저 따위 막장 드라마를 가족이 모이는 시간대에 하느냐”고 욕하면서도 한 주도 거르지 않고 계속 챙겨보는 것은 드라마 작가가 욕망이라는 코드를 잘 건드려 주기 때문입니다. 하얀 거짓말 하느라고 피곤한 우리 자아를 조금은 느슨하게 만들고 웃겨 주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여자가 아름답게 꾸미고 싶은 욕망, 무죄입니다. 그러나 ‘알뜰살뜰 절약하며 살아야지’ 하는 삶의 인지적 틀과는 충돌이 있겠죠. 사연 주신 분, 바로 그 지점에서 0 하나 빼는 거짓말이 시작된 겁니다. 거짓말하는 사람도 마음이 편한 건 아닙니다. 범죄형 성격인 사이코패스가 아닌 다음에야 사람은 누구나 타인에게 거짓말할 때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죄책감은 생각보다 강한, 스스로 하는 심리적 처벌입니다. 자존감을 망가뜨리기 때문이죠. 스스로 이미 벌을 주었는데 남편이 또 핀잔을 주니 아내는 열 받아 쏘아붙이게 되는 겁니다. “넌 거짓말한 적 없었어?” 하고 말이죠.

 하얀 거짓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어찌 보면 마음이 더 여리고 남에 대한 배려가 많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비밀이란 것은 인간 관계에 있어 완충제 역할을 합니다. 거짓이 나쁘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전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자신의 비밀스러운 속마음을 다 드러내 놓는다면 세상은 망가질 것입니다. 가족 구성원 간의 거짓말, 섭섭하다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가족 간에 거짓말이 더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족은 가장 친밀한 관계이기에 그만큼 비밀이 많아지는 겁니다. ‘내가 이 남자와 왜 결혼했지, 그전에 사귀었던 남자가 훨씬 나았는데 ㅜㅜ’ 란 생각, 문득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 간 비밀은 있을 수 없다며 남편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사고가 커집니다.

 어머니 세대의 화병, 비밀을 지키기 위해 거짓말하다 지쳐 생긴 질환입니다. 어머니의 모성애는 가족의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게 합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안 해주고 무뚝뚝한 남편, 술 먹고 들어와 주정까지 하지만 아이들이 아빠에 대해 뭐라 하면 엄마는 아빠를 변호합니다. 속으로는 확 결혼생활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말입니다. 자녀 걱정에 남편의 외도마저 눈감아 주고 사는 것이 모성애의 무서운 힘이죠. 하지만 거짓말하다 마음은 골병듭니다.

 직장 생활 하는 세상의 아버지들도 모두 거짓말 천재들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사지만 있는 힘을 다해 충성스러운 모습을 보입니다. 계속되는 거짓말 작업은 자기 존재감에 상처를 주기에 술 한잔 안 할 수 없습니다. 술은 억제를 풀어줍니다. 거짓말에 대한 강박을 풀어주고 속내를 이야기하게 합니다. 친구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것은 문제없지만 실수로 상사가 있는 회식 자리에서 얼큰하게 취해 상사에게 쏘아붙이면 몇 년 공들인 거짓말의 효력이 곧바로 날아갑니다. 아침에 머리를 쥐어뜯게 되는 거죠.

 인간은 이중적입니다. 그렇기에 거짓말을 합니다. 이중적인 사람은 나쁘다 하지만 정신의학적 관점에서는 틀린 말입니다. 인간은 평생 욕망하도록 설계돼 있고 동시에 다른 사람에겐 좋은 모습을 보여 사랑 받고 싶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이고 새빨간 욕망을 막장 드라마처럼 실제 생활에 드러내 놓고 살 수 없기에 마음속 비밀을 지키는 거짓말은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하는 명확한 순기능을 합니다.

 ‘비밀에 대한 집착은 세상에 대한 환멸이다’란 말이 있습니다. 세상살이가 마음에 안 들고 짜증이 나니 남의 비밀을 캐 들어 간다는 것이죠. 남이 근사하고 우아한 이미지로 사는 게 거슬리는 겁니다. 비밀이란 방어벽을 뚫고 그 사람 욕망의 실체를 노출시키고 나면 ‘너나 나나 똑같네’라며 삶의 위안을 받는 것이죠. 요즘은 남의 비밀을 넘어서 스스로 자신의 비밀을 노출하기도 합니다. 음주운전 후 경찰서 주차장에 파킹하고 자수한 남자 연예인,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해가 될 듯합니다. 그 사람을 직접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추측해볼 수는 있습니다. 아마 속마음엔 좌절된 욕망도 있고 삶의 짜증도 가득할 텐데 남을 계속 즐겁게 해줘야 했겠죠. 누가 봐도 성공한 부러움의 대상이지만 자본주의의 성공이 꼭 마음의 행복과 직결되는 건 아니기에 무의식은 자기 자신의 비밀을 진하게 열어 젖혀 자유를 얻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나를 ‘척’하게 만드는 거짓말은 매우 피곤한 일이니까요.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가끔 제 글을 보고 “당신은 그 내용대로 사느냐”라며 무섭게 쏘아붙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연히 아니죠. 저도 욕망 덩어리니까요. 운전 이상하게 하는 사람 보면 차 창문 내리고 욕하고 싶은데 혹시 나를 알아볼까 싶어 꾹 참습니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죠, 화 안 난 척.

 상대방의 욕망, 그리고 소통을 위해 노력하는 하얀 거짓말에 대한 존중이 있었으면 합니다. 하나는 유전적으로 설계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후천적으로 습득한 기능이니까요. 아내의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욕망과 미안한 마음에 하는 하얀 거짓말, 이해하자고요.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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