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배명복 칼럼

미·중 신시대 개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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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빛바랜 사진 속 두 사람이 웃고 있다. 마오쩌둥(毛澤東) 중국 국가주석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 둘은 손을 마주 잡고 그윽한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위 사진). 1972년 2월 21일, 베이징에서 촬영된 이 한 장의 사진은 미·중 화해의 상징이 됐다. 그로부터 강산이 네 번 바뀔 만큼의 시간이 흐른 2013년 6월 8일, 미 캘리포니아 랜초미라지의 휴양지 서니랜즈. 두 사람이 노타이 와이셔츠 차림으로 나무 벤치에 앉아 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다(아래 사진).

 41년 전 중국을 방문하면서 닉슨은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수종(樹種)인 미국 삼나무 묘목을 선물로 가져갔다. 오바마는 아예 미국 삼나무로 벤치를 만들어 시진핑에게 선물했다. 그리고 그 위에 함께 앉아 포즈를 취했다. 중국 언론은 미·중 신시대의 개막을 상징하는 역사적 사진이라고 흥분하고 있다. 묘목이 자라 거목이 되고, 그 거목으로 만든 벤치에 미·중 정상이 나란히 앉아 천하대세를 논할 정도가 됐다는 것이다.

[신화=뉴시스]

 이번 미·중 정상회담은 여러 면에서 파격이었다. 격식에 얽매인 공식 회담이 아니라 느긋한 분위기에서 가감 없이 속내를 털어놓는 비공식 회동 형식을 취한 것부터가 이전과 달랐다. 두 사람은 회의와 만찬, 산책을 포함해 1박2일에 걸쳐 총 8시간 동안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눴다. 미·중 정상이 서로 흉금을 털어놓고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개인적 친분을 쌓는 것이 서니랜즈 회동의 목적이라면 그 목적은 달성됐다. 이전의 중국 지도자들과 달리 시진핑은 준비된 메모 없이도 자연스럽게 미 정상과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지도자임을 입증했다.

 지난주 서울에 온 찰스 쿱찬(조지타운대·국제정치학) 교수는 “21세기는 미국의 세기도, 중국의 세기도 아닌 ‘노 원스 월드(No One’s World)’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중앙일보 6월 7일자 8면). 어느 나라도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는 ‘무주공산(無主空山)’의 시대라는 것이다. 미국이 기울고 중국이 부상하지만 과거 미국이 누렸던 정도의 영향력은 행사할 수 없을 거란 얘기다. 따라서 21세기에는 미국과 중국이 상호존중과 이해를 바탕으로 서로 협력하는 것이 양국은 물론이고 국제사회에도 도움이 된다고 그는 강조한다. 지나친 경쟁에 의존하는 ‘제로섬 관계’를 지양하고 서로 윈-윈하는 상생 관계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이 21세기 미·중 관계의 모델로 추구하는 ‘신형(新型) 대국관계’와 차이가 없어 보인다.

 미·중 관계의 새로운 양식을 선보인 서니랜즈 회동에서 두 정상이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은 북한 문제였다. 시진핑이 준비해간 마오타이주로 건배를 한 만찬 대화의 최대 화제도 북한이었다. 회담을 마친 후 언론 브리핑에서 톰 도닐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미·중은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할 수 없고, 북한은 핵을 포기해야 하며 북한의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해 긴밀히 협력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또 “북한에 대한 두 정상의 ‘공감대(common ground)’는 미·중 협력을 강화하는 열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향후 미·중 관계가 새로운 대국관계로 갈 수 있을지를 판가름하는 시금석이 북한 문제라는 뜻이다. 북한으로선 섬뜩한 얘기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중국의 시각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보긴 아직 이르다. 완충지대로서 북한의 존재가 여전히 중국의 국익에 플러스라고 판단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북한을 지나치게 압박해 체제 자체가 흔들리는 상황은 원치 않는다고 보는 것이 상식에 부합한다. 핵문제와 관련해 중국이 북한의 팔목을 비틀더라도 일정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점까지 미·중 정상 간에 솔직한 의견 교환이 이루어졌는지는 공개하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다. 북핵을 용인할 수 없다는 미·중 정상의 일치된 입장이 앞으로 어떤 행동으로 구체화할지 보면서 판단할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미·중 관계는 이미 북한에 부담과 압박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서니랜즈 정상회담이 열리기 하루 전 북한은 남북대화를 전격 제안했다. 정부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12일 재개되는 남북대화를 통해 한반도 긴장을 완화하고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어야 한다. 쉽고 급한 문제부터 하나하나 풀어나감으로써 신뢰를 쌓아야 한다. 박근혜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와 미·중의 북핵 해결 노력이 투 트랙으로 진행돼 끝에서 만나도록 해야 한다. 미·중 신시대 개막과 함께 한반도 정세 대전환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 역사적인 기회를 살릴지 못 살릴지는 박근혜정부의 의지와 역량, 그리고 용기에 달려 있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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