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장 공모 받아놓고 임명제 추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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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제 8대 국립중앙박물관장 선임을 놓고 문화계가 쑥덕공론에 빠졌다. 공모에 응한 4인에 대한 얘기도 그렇거니와 문화관광부가 관장직을 차관급 정무직으로 바꾸는 직제 개편안을 행정자치부에 올려 국무회의 의결만 남기고 있어 사정은 더하다.

문화계 한 인사는 "2000년에 처음 시행한 개방형 임용제를 정무직 임명제로 바꿔야 한다는 얘기는 문화계 내부에서 이미 나온 것"이라고 말하고 "문제는 직제 개편이 유력한 상황에서 무리하게 공모를 시행함으로써 자칫 해프닝을 빚을 공산이 높아 보인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문광부의 직제 개편은 늦어도 20일께 결정될 예정이다.

◇개방형 공모 왜 서둘렀을까=문화계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뒤편의 사연은 '문광부가 임명제로 가닥을 잡아놓고도 왜 개방형 임용제라는 연막을 피우며 신청자들의 서류를 받았는지'다.

이미 알려진 대로 여기에는 강우방.김홍남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 이건무 국립박물관(이하 국박) 학예연구실장, 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네 명이 신청서를 냈다. 그러나 관장 자리가 임명제로 바뀜과 동시에 이들의 출사표는 허사가 된다.

이에 대해 문광부 고위 관계자는 "직제개편이 여의치 않을 경우 바로 인사위원회를 꾸려 새 관장 선발에 들어가야 하는 업무상 과정이었다"고 해명했다. 이 관계자는 "신청서를 낸 네 분 지원자는 임명제로 바뀌더라도 제일 첫 머리에 추천 인사로 거론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국박 주변에서는 이번 일에 대해 석연치 않은 대목이 있다는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 한 관계자는 "문광부 고위 관리가 직접 나서 이번 일을 진행시키면서 내정한 한 인사에게 신청서를 내지 않도록 이미 조율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말했다.

◇정무직 임명제 직제 개편이 대세=문광부는 국박 관장 자리를 차관급으로 격상하는 것이 오래 전부터 논의돼 온 사안이었기에 갑작스러운 변화는 아니라고 설명했다.

2005년 6월 개관 예정인 용산 새 박물관 시대를 이끌 수장의 위상을 고려했다는 얘기다.

또 1999년 현 지건길 관장 때부터 시행했던 개방형 임용제가 선발 과정에서부터 공정성 논란을 빚었기 때문에 대통령이 임명하는 옛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박 전문직들 사이에서도 이를 지지하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 김병모 한국전통문화학교 총장은 "현재의 공모 신청 방식은 문제가 있었다"며 "적격인 후보를 널리 추천받아 그 가운데 한 명을 임명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조유전 전 문화재연구소장도 "국박 관장은 한 나라의 문화를 대표하는 얼굴이니 국무위원급으로 대접하는 것이 옳다"며 "컴퓨터나 영어 실력을 따져 심사하고 경쟁시키는 일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첫 개방형 임용제 관장으로 오는 3월 19일 물러나게 될 지 관장은 "임명제라고 다 좋은 건 아니다. 자칫 정부의 입김이 작용해 박물관 대역사를 앞두고 행정력 운운하며 낙하산식 인사가 될 수도 있다"고 우려하는 시각을 보였다.

◇정치적 입김은 막아야=전문가들의 얘기는 한마디로 어떤 방식이든 전문성을 갖춘 인사가 선임되면 문제가 없는 것으로 모인다. 새 관장은 특히 용산 이전을 앞둔 국박이 중요한 전환점을 맞고 있어 더 그러하다.

이원복 국립광주박물관장은 "이전 관장들은 다 30여년 이상씩 박물관에서 뼈가 굵은 현장 사람들이었다"며 "이런 전환기에 외부 인사가 올 경우 합리성과 효율성 모두가 망가질 수 있다"고 걱정했다.

이인범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미술연구소장은 "지금 국박은 개혁과 혁신을 일굴 수 있는 호기를 맞았다"며 "이 중차대한 일을 제대로 해나갈 수 있는 능력과 경륜을 갖춘 인물이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을 수 있도록 문화계 모두가 관심을 보이고 감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재숙.신준봉 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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