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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든협정…휴전15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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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27일은 휴전조인 15돌이 되는날-. 53년7월27일밤10시, 전전선에서에서 총소리가 멎고 3년동안 포화가 오가던 전투가 멎은지 15년이 지났다. 쌍방은 협정에따라 전선에서 2킬로씩 물러나 1백55마일의 국토의 허리에는 폭4킬로의 비무장지대가 마련되고 무장속의 평화가 오는가 싶었지만, 북괴의 도발로 협정의 정신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휴전 15년동안 북괴가 범한 대소협정 위반사건은 무려 6천6백29건에 달했고 북괴는 판문점을 발악적인 선전장으로악용, 협정정신을 추호도 지키지않고있다. 15년동안 판문점에서 벌어진 북괴의 발악, 자유에의탈출등 벌어진사건들을 추려보면-.

<여객기창낭호 납북>
58년2월16일낮 부산을 이륙, 서울로 날던 KNA소속 여객기창낭호(HL=06)가 승객을 가장, 탑승했던 북괴무장간첩단에 의해 납북되어 붉은땅에 강제착륙당했다. 판문점을통한 송환교섭끝에 무장간첩을 제외한 26명의 승객과 승무원은 20일뒤에(3월6일하오)자유대한으로 돌아왔으나 기체와 화물은『돌아가고싶지않다』고 했는지 지금껏 소식이 없다.

<이동준기자의 귀순>
59년1월27일 군사정전위 96차본회의에 취재나왔던「프라우다」지 평양주재기자 이동준씨는 판문점에서 평소인사를 나누며 지내던 대한민국의 K기자에게 월남할뜻을 전해왔다. 이사실을 연락받은「유엔」군측은 이씨에게 괴뢰병의 눈을 피해 「유엔」군측 건물로 들어오라했다. 이씨는 건물안에서 미군군복을 갈아입은뒤 식사운반차를타고 판문점을 빠져나왔다. 북괴가「유엔」군건물입구에 경비병을 배치하기시작한것은 이때부터.

<초소습격의 첫시도>
61년8월25일 밤9시쯤 북괴전투경찰대는 금화부근의 군사분계선을 2백미터 불법남침, 「유엔」군 초소에 수류탄을 던져 한국군1명이 전사, 4명이 중상을입었다. 북괴는 현장검증할것에 동의했으나「유엔」군측이 현장부근의 북괴초소를 검증하자고 제의하자 그들은 태도를 돌변,『이것은「유엔」군측의 내부충돌이며 우리(북괴)를 모략하기위한 조작』이라고 생떼를 썼다. 이것이 초소기습사건의 첫시도였다.

<미군순찰차량 피습>
62년7월29일 아침5시40분 군사분계선을 불법남칩, 매복하고있던 북괴병이 비무장지대「유엔」군측지역을 차량순찰하던 미군을 습격, 미군 2명이 전사, l명이 중상을 입었다. 「유엔」군측은 즉각 정전위를 소집, 현장에서 발견된 소제수류탄, 7·62밀리탄피등을 증거물로 제시, 북괴의만행을 강경히 규탄했으나 공산측은 『「유엔」군이 꾸며낸 음모』라는 적반화장격인 답변을했다.

<미군초소에 수류탄>
62년11월20일 밤8시반쯤 수미상의 북괴병이 또다시 휴전선을 불법남침, 서부전선의 한 미군초소에 소제수류탄을 던져 미군1명을 숨지게하고 다른 1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62년께부터 북괴는 더욱 악랄한 수법으로「유엔」군에대해 각종 도발행위를 감행하기 시작했다. 북괴는 62년에 6백11건, 63년에 9백85건, 64년엔 1천2백95건의 위반사건을 저질렀 다.

<서해 초계정에포격>
62년12월23일 낮11시쯤 서해연평도근해를 초계중이던 해군함정이 무도(북괴통제하)쪽에서갑자기 나타난 북괴쾌속정 2척에 기습당해 6명의 사상자를냈다. 이사건이 나자 북괴는 정전위원회를 앞질러 소집, 『「유엔」군측 함정이 무도남쪽2마일해역에 침입, 수천발의 포격을(북괴에)퍼붓고 도망쳤다』고떠들어됐다. 이때부터 북괴는 빈번히「판문점 회담 소집 선수치기」전술을쓰기시작했다. 휴전후 열린 2백74차의 본회의중 1백97차례의 회의가 공산측요청으로 열렸다.

<공동감시소조 기습>
63년11월13일 낮1시35분 북괴에 사전통고를하고 북한강에「보트」를 띄워 군사분계선 표지판을 조사하던「유엔」군측 공동감시소조원10명이 북괴의 기관총사격을받고 한국군장교1명이 순직, 1명이 중상을입었다. 생존자는 찬물속에 여러시간 잠겨있다가 대안에 집결한 아군엄호아래 야음을 이용, 안전지대로 철수하는데 성공했다. 「유엔」군측은 정전위원회 구성「멤버」에까지 적대행위를 감행하는 북괴의 만행을 엄중항의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임승상중위의 희생>
65년5월18일 하오3시43분 육군제25사단 항공대소속 임승상중위가 조종하던 경비행기(L19)가 비무장지대에 잘못들어갔다가 북괴의사격으로 추락, 임중위는 순직했다. 북괴대표 박중국이 정전협정위반사실을 시체인수중에 기입않으면 시체를 돌려보낼수없다고 떼를쓰자「유엔」군측 수석대표「윌리엄·P·야보로」소장은『동포의 시체마저 선전재료로 쓰려하느냐』고 박을 공박했다. 고임중위의시체는 3일뒤 판문점에서 전우들의 품에안겼다.

<조개잡이어부 납치>
65년10월29일 하오2시쯤 서해함박도동북방에서 조개를잡던 우리어민 2백29명과 선원20명중1백9명이 느닷없이 나타난 북괴병에게 잡혀갔다. 「유엔」군측의 거듭된 송환요구에 북괴는 처음엔 모르는척 하다가 2O일뒤인11월20일 하오3시45분『어부들을 오늘 4시에 송환하겠다』고 기습통고, 15분후에 그중 1백4명을 판문점에서 풀어줬다.

<어로보호 56함침몰>
67년1월19일 하오2시34분 동해 어로저지선 부근에서 어로보호작전을하던 우리해군의 PCE56함이 북괴해안포대로부터 2백80여발의 집중사격을 받고 침몰, 해군장병 40여명이 전사했다.
이날 수많은 우리어선이 저지선에 바싹 붙어 조업중이었는데 56함은 하오1시50분쯤 북괴초계정 2척이 어선단쪽으로 남하하는것을 멀리서 포착, 현장으로 들어가서 어선들을 남쪽으로 좇고있었다.

<이수근씨 극적탈출>
67년3월22일 하오5시26분 정전위 242차 본회의가 막 끝나「유엔」군측대표들이 회담강앞 마당에 대기시켜논 차를타고 돌아오려는 순간 북괴기자 1명이 차석대표의「세단」차에 뛰어들었다. 북괴중앙통신 부사장 이수근씨였다. 이씨를 끌어내리려는 괴뢰병을 밀어제치고 차는 쏜살같이 판문점을 빠졌다. 괴뢰병은 권총을 난사했으며「세단」차는 괴뢰군 초소앞의 차단봉에 걸려 앞유리가 부서졌지만 위기일발로 탈출에 성공했다. 이일이 있은후 북괴는 회담종료 2O분전에 그들의 기자를 판문점에서 철수시켰다.

<판문점지원사 기습>
67년8월28일 하오4시45분 판문점지원사령부 주변 숲속(비무장지대남방한계선남쪽5백미터)까지 깊숙이 불법침투해온 북괴병이 미76공병대 C중대 식당에 기관총을 난사, 미군1명과「카투사」2명이 전사하고 25명이 중상을 입었다. 또 68년4월14일밤 괴뢰병은 판문점남쭉대성동입구까지침입, 매복하고있다가 교체헌병을태우고 판문점으로들어가던「드리쿼터」를 습격, 미군과 미군과「카투사」4명이 전사, 2명이중상을입었다.

<1·21남침 푸호납치>
68년1월21일 북괴무장공비31명이 청와대를 폭파하고 정부요인을 암살할목적으로 법원리를 거쳐 서울세검동까지 침입했다가 군경의 추격을 받고 그중 김신조가사로잡히고 나머지는 거의 몰살됐다. 이틀뒤인 23일 낮1시45분 북괴는 원산만앞 공해상에서 초계정 4척과「미그」기 2대를동원, 미해군정보수집함「푸에블로」호를 납치하여 세계를 한때 긴장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북괴침범 모두 격퇴>
68년6월19일새벽1시에서5시사이에 북괴군7명이 중부전선의남방한계선을 넘어왔다가 아군에의해 모두 사살, 남침야욕이 꺾였다. 또한 6월22일에는 7명의북괴군이 서부전선에서 남방한계선을넘어 침투해왔다가 7명 전부 사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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