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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괴 광분 바로 보자|자유의 품 첫 6·25…김신조는 말한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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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총알에 얻어맞고 피를 흘리며 일어나 봤댔자 그때는 이미 때가 늦습니다. 먼저 침략을 당하기 전에 무찔러야 되고 완전한 무장으로 방어해야 됩니다.』-
북괴가 남파한 무장공비로 남하했다가 붙들렸던 김신조(27)는 6·25열여덟돌을 맞아 이같이 주장했다.
그는 중앙일보사가 이날을 맞아 마련한 회견에서 『북괴는 지금 18년 전의 오늘과 꼭같은 새로운 침략의 준비에 온통 광분하고 있다』고 하면서 「방위체제」가 하루 빨리 갖추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1·21사태가 벌어진지 꼭 5개월째, 지금의 그는 바쁘다. 당국의 특별한 배려와 감화에 힘입어 「대한민국의 품」에 안긴 것을 만족하기에 앞서 지금의 그는 북에서 그의 눈으로 똑똑히 본 무서운 사실들을 알려야만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는 25일 서울시민회관에서 남파이래 처음으로 공개 강연도 갖는다.
그가 폭로한 북괴의 전쟁도발을 위한 침략 준비상황은 이러했다.
첫째로 북괴는 공장이 두 가지의 생산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준비를 다 했다는 것이다. 평화시에는 「트랙터」를 만들다가도 전시에는 「탱크」와 수류탄을 만들 수 있는 체제가 확립되어 있다는 것.

<배급도 점수 따라>
지난 58년6월 북괴는 각 도에 15개의 지방산업공장을 설치, 이곳에서 모든 병기와 군수품을 만들어 언제나 명령에 따라 충분한 무기공급을 가동하도록 했다. 둘째로 북괴는 헐벗고 굶주리는 북한동포들을 동원, 이른바 「노농적위대」편성을 모두 끝마쳤다. 17세에서 50세까지의 남자는 물론 여자들도 각 직장 단위로 편성된 노농적위대에 묶여 군사훈련을 받는다.
특히 생산공장은 4급 기업소로 나누어져 소위 중앙의 공업성에서 관장하는 1, 2급 기업소에서 노동하는 노동자들은 각각 사단과 연대단위로 편제되어 소위 북괴의 보위성으로부터 직접 파견된 군관들로부터 군사훈련을 받는다.
그밖에 소단위의 3, 4급 기업소도 자체 무장을 완비했다는 것. 이들의 무기는 6·25침략 당시 북괴군이 사용하던 무기를 인수했다는 것이며 그 대신 지금의 정규 북괴군은 또다른 장비로 무장을 하고 있다. 군사훈련은 과거에는 1주에 한번씩 했었으나 지난 65년도부터는 겨울에도 20일 동안 장기적으로 야외훈련을 할만큼 고된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어느 때는 군과 적위대가 합동작전을 벌여 실전연습을 하기도 하고. 농민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50세까지 적위대>
각 농장과 협동조합 단위로 노동적위대가 편성되어 있으며 농번기를 빼고는 한달에 20일씩 군사훈련을 받는다. 농민들도 훈련엔 우의 점수를 맞아야만 식량 등 여러 가지 배급을 받을 수 있다.
이같은 군사훈련은 중·고·대학의 모든 학생들에게도 실시되고 있다. 65년 북괴의 노동적위대 사령관 최현이 『아무리 배워도 필요 없다. 먼저 사상부터 무장하고 배워야 한다』는 연설이 있고 난 다음부터 학생들에 대한 군사훈련은 전격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것이다.

<여자도 12㎞뛰기>
군사 과목 50점 이하의 낙제점수를 맞으면 다른 전공과목도 이에 따라 낙제점수로 간주된다. 배낭을 짊어지게 하고 김일성이 배운 실전 경험을 한다는 구실로 산악훈련을 시키는가 하면 작년의 평양 수해 복구 작업에는 대규모의 학생들을 돌격대로 조직, 군사훈련을 하는 식으로 수해의 복구작업에 동원시켰다는 것.
심지어 농촌이나 도시의 공원에서 휴식할 때도 「전쟁연습」을 시키면서 쉬게 한다. 어느 공원과 동네 숲에도 높이 16미터, 폭 30미터 간격의 높은 막대에 비행기와 낙하산 모형을 매달아 놓고 그것을 쏘아 맞히는 연습을 시키며 커다란 「탱크」의 모형도 만들어 두고 수류탄 던지기 연습을 하게 한다.

<당하기 전 막아야>
여자들더러 12킬로를 뛰라면 한국에서는 기절할 지경이지만 북녘의 여성들은 이를 예사로 한단다. 작년 11월 평양에서 열린 「여성 노농적위대 무장 강행군」이 있었을 때엔 여자들이 완전 무장, 평양에서 강행군 훈련의 시범을 보인 일이 있었다기도.
이 말을 하면서 김신조는『한국의 여성들이 「미니스커트」를 입고 참새처럼 날 듯이 행복에 겨워하지만 시커먼 얼굴을 한 북녘의 여성들이 총을 겨눌 땐 그때에도 「미니」를 입고 맞서 싸우겠느냐』고 꼬집어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김은 『지금 대한민국 국민은 아늑한 평화와 번영의 분위기를 마냥 누리고 있지만 내가 이북에서 본 북괴의 전쟁준비광경을 생각하면 안타깝기만 한 노릇』이라고 열을 띠었다. 그의 말마따나 대한민국엔 「슬퍼서 한잔」 「기뻐서 한잔」마시는 「소비적 계급」이 너무 많고, 이런 환경은 자라나는 청년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고 서슴없이 말했다.
9세때 청진에서 6·25를 겪었다는 김신조는 그때의 참상을 똑똑히는 기억하지 못했다.
『나도 「자유」란걸 대한민국에 와서 처음 누렸습니다. 그러나 서울시내 거리의 사치스런 여인들을 볼 때 저런게 「자유」인가라고 의심하게 된다』 『우리가 먼저 저들로부터 당하기 전에 새로운 정신 무장으로 이를 막아내야 한다』고 또한번 북괴의 전쟁도발 행위를 막도록 강조했다.

<공학도 되고 싶어>
그래서 그런지 아직 총각인 김은 「얌전한 아가씨」가 좋단다. 요새는 『절망은 없다』 『여기에 한 인간이 있다』(막사이사이저)는 책을 읽으며 휴식할 땐 「텔리비젼」도 즐겨 본다는 그는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대한민국에서 새로 보고 느낀 점을 간추려 글을 내보고 싶은 충격을 느낀다고도.
선반 공학을 더 배워 공학도가 되고 싶다는 김신조는 이제 긴장감이 완연히 가신 모습. 얘기할 때마다 순한 「시골의 청년」처럼 곧잘 웃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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