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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범죄폰을 찾아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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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SK텔레콤 홍길동(가명·45) 매니저는 회사보다는 검찰청·경찰청 출입이 더 잦은 사람이다. 홍 매니저가 하는 일이 조금 특별해서다. 그는 23일에도 서울지검 검사를 만나 수사 협조 ‘자료’를 주기로 했다. 그 자료는 5000여 건에 이르는 ‘이상 개통 의심 휴대전화번호’다. 정상적으로 개통되지 않은, 그래서 범죄에 쓰일 가능성이 큰 번호 리스트다. 매일 2700만여 개(SK텔레콤 가입자 전체)의 휴대전화번호를 점검하기를 한 달, 수십 개의 조건으로 전체 자료를 분석한 끝에 찾아낸 진짜 ‘의심’ 번호다.

이전에는 자료를 만들어서 가져다줘도 확실한 증거가 아니라며 경찰조차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검사가 먼저 직접 연락해 도와달라고 할 정도다. 통신 관련 범죄의 피해자는 주로 서민들이다. 새 정부가 강조하는 민생경제 사범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면서 검찰·경찰이 발 벗고 나섰다.

작년 피해액 850억, 대부분 서민이 당해

 범죄자를 잡는 건 이들 몫이지만, 애초에 범죄 적발에 필요한 자료는 통신사가 가지고 있다. 범죄가 커지기 전에 통신사가 나서 이를 막는다면 한 명의 피해자라도 줄일 수 있다. 실제로 홍 매니저가 주도해 통신범죄 일당을 적발한 경우도 많다. 지난해 12월에는 외국인·노숙자 명의를 사서 ‘대포폰(다른 사람 명의로 개통한 휴대전화)’ 6만 대를 개통해 대부업체와 보이스피싱 업체에 불법 판매한 일당을 경찰에 신고했다. 올 1월에는 휴대전화 대출, 일명 ‘휴대폰깡’에 쓰인 스마트폰 4500대(시가 40억원)를 중국으로 밀반출하려던 조직을 적발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줬다.

통신범죄는 갈수록 조직화·고도화되고 있다. 개별 통신사가 손쓰기 어려울 정도다. 통신범죄의 뿌리를 쫓다 보면 그 근원에는 유명 조직폭력 집단이 있는 경우도 많다. 게다가 경기불황이 장기화되면서 휴대전화 담보대출 사기, 명의대여 사기 등도 급격히 늘고 있다. 급하게 돈은 필요한데 빌릴 곳은 마땅치 않고, 그렇다 보니 찜찜하지만 휴대전화 담보대출을 받거나 명의를 빌려줘서 통신범죄의 피해자가 된다. 방송통신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접수된 휴대전화 명의도용 건수는 9455건에 달한다. 2011년 전체로 1만4545건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난해에 명의도용 접수 건수가 30% 정도 늘어났다는 계산이 나온다.

의심번호 쫓다보면 배후에 조폭 많아

 이동통신 업계가 자체적으로 추산한 피해는 더 크다. 명의도용을 포함해 통신범죄 피해액은 2011년 260억원에서 지난해엔 850억원으로 세 배 넘게 증가했다. 통신범죄를 목적으로 지난해 개통된 휴대전화가 약 12만 회선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렇게 통신범죄가 조직화되고 급증하다 보니 개별 통신사 단독으로는 통신범죄를 통제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최근 통신3사가 통신범죄에 대한 소통을 위해 ‘협의체’를 구성했다. 한 통신사 관계자는 “서로 한 치의 양보 없는 싸움을 하는 회사들이 이례적으로 공동 대응에 나선 것은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이 협의체는 정기적으로 모임을 열고, 통신범죄에 연루된 판매점과 유령법인 리스트를 신속하게 공유할 계획이다. 아울러 그간 각 통신사가 독자적으로 연구개발해 온 통신범죄 대응 기법 및 시스템을 경쟁사와 공유해 공동 연구를 통해 기법을 발전시켜 나가기로 합의했다. 한 이통사 관계자는 “협의체 구성으로 통신사를 옮겨가며 벌이던 통신범죄를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통사, 범죄 연루 대리점·유령법인 리스트 공유

협의체를 구성했다지만 5300만 개의 전체 휴대전화 회선을 사람이 일일이 점검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도입한 방식이 ‘빅 데이터’ 분석이다. SK텔레콤은 지난해 9월 ‘통신범죄 자동적발 시스템(FDS)’을 개발했다. 150여 개 통신범죄 의심 시나리오에 따라 매일 전 가입자의 정상 사용 여부를 파악하고, 수상한 회선을 추려낸다. 예를 들어, 최근 스마트폰을 개통한 A씨의 가입자식별카드(USIM) 개통이 며칠째 미뤄지고 있다고 하자. 보통의 경우엔 대리점에서 스마트폰 가입과 동시에 USIM 개통을 한다. 개통이 안 된다는 건 뭔가 이상하다는 의미다. FDS가 이런 상황을 걸러주면 직원이 직접 A씨에게 전화를 걸어 실제로 스마트폰을 개통했는지를 확인한다. 명의를 도용당한 것으로 밝혀지면 스마트폰을 해지해 A씨가 피해자가 되는 걸 막아준다.

 FDS는 단말기 하나에 여러 개의 USIM을 꽂아 사용하는 경우(대포폰 의심), 휴대전화 구입 후 한 번도 이용하지 않은 경우(해외 밀수출 의심), 1명이 여러 지역을 옮겨가며 여러 개의 휴대전화를 개통하는 경우(대출폰 의심) 등을 점검한다. SK텔레콤은 매일 4000~5000건의 1차 의심군을 찾아낸다. 이 가운데 특히 범죄 연루 가능성이 큰 600~1000건을 추려 검찰·경찰에 통고한다. SK텔레콤 관계자는 “ SF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나오는 것처럼 범죄가 벌어질 현장에 미리 가 있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LG유플러스는 ‘파수대 시스템(WTS)’을 구축했다. FDS와 유사한 방식으로 이상 징후를 쉽게 파악해 대비할 수 있도록 했다. 최근에는 정부와 통신사가 구축한 공조 시스템도 도입됐다. 방송통신위원회와 한국정보통신진흥협회(KAIT)·SK텔레콤·KT·LG유플러스·SK브로드밴드 등은 단기간에 복수의 유·무선 서비스를 개통한 ‘수상한’ 가입자들을 골라내는 시스템을 지난해 8월부터 운영하고 있다. 2주 내에 휴대전화 등 무선통신 서비스를 3회선 이상, 초고속인터넷 등 유선서비스를 4회선 이상 개통하면 이를 각 통신사에 통지해 대응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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