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섭은 도깨비 방망이, 융합은 요술봉?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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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호 30면

서로 다른 여러 분야를 연결하고 뒤섞는 이른바 통섭과 융합이 대세다. 특히 첨단 대한민국의 숭고한 상아탑에서는 통섭을 무슨 도깨비방망이처럼 내리쳐 뚝딱 하면 이러한 학과가 저러한 학과로 아리송하게 둔갑하고 융합을 무슨 요술봉처럼 추어올리며 뾰로롱 하면 이러한 연구소와 저러한 연구소가 흘레붙어 분위기가 오묘한 제3의 연구소로 재탄생한다.

 물론 거기에는 등록금 장사에 별 보탬이 안 되는 학과들의 폐기 처분과 자기기만이 전제돼 있다. 시대의 흐름과 요구에 따라 소멸하고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새것들이 등장하는 광경은 지극히 명쾌한 일이다. 밀려오는 장강의 뒤 물결을 막을 수 있는 앞 물결은 없다. 무성영화의 변사가 사라지고 타자기와 주판이 사라지고 천연두와 소련이 사라지고 자본주의적 측면에서 시인이 사라지고 대중 상업매체의 텍스트 제공자 내지는 광대로서의 글쟁이만이 존재할 뿐 예술가로서의 작가라는 개념도 사실은 사라진 지 한참이다.

 T 칼라일은 썼다. “과연 변화는 고통스럽다. 그러나 항상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만일 추억에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면 희망에도 힘과 가치가 있을 것이다”라고. 좋다. 통섭과 융합이 정말 그런 희망에 속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그것을 적극 수용해 발전의 도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적어도 영미 쪽에서는 통섭과 융합이 학문과 예술의 변화를 주도하는 코드로 확실히 자리 잡은 듯싶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점에서 자문해 봐야 한다. 우리의 통섭과 융합이 그 통섭과 융합 맞는가? 과연 우리의 통섭과 융합은 적절한 사전조건을 담보한 채 진행되고 있는 것인가? 만약 우리의 통섭과 융합이 우리의 고질병이 찾아낸 새로운 숙주라면?

 가령 1980년대 말과 90년대 초에 걸쳐서 우리에겐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도깨비방망이 겸 요술봉이 바다 건너로부터 날아들어왔더랬다. 하지만 우리에겐 우리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자생하지도 않았고 다른 나라의 포스트모더니즘을 제대로 감상할 기회도 없었다. 다만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2차 문헌들, 즉 평론 같은 것들이 날림으로 번역 수입돼 우리의 불타는 허세와 현시 욕구에 기름을 부었고 온 문화계가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의 풍문 속에서 억지로 포스트모던한 작품들을 조장해 내느라 제 정신들이 아니었다.

 자동차라고는 한 대도 없는 나라에 운전교본이 들어와 자동차에 대한 공상을 유행시킨 뒤 그것이 실제로 사방에 자동차들이 다니고 있다는 착각으로까지 이어져 온 나라를 가짜로 만들어버리는 셈이 아니고 뭔가. 자동차를 몰아본 자는커녕 자동차를 구경해본 자도, 자동차가 다닐 도로조차도 전혀 없는 상황에서 말이다. 나는 우리 학계의 통섭과 융합도 이와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통섭과 융합이란 고수들끼리의 통섭과 융합이지 이제 갓 입문한 자들끼리의 통섭과 융합은 아닐 것이다. 하나의 학문에 정통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가.

 지난 25년간 글을 놓지 않으니 겨우 가나다라마바사가 조금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이 엄중한 장인의 길이다. 고수들끼리는 서로가 하늘과 땅만큼 떨어진 분야에 속해 있다 할지라도 내용과 은유와 상징 등이 귀신이 곡할 노릇처럼 통섭되는 법이다. 진정한 융합 역시 이러한 이치 안에서 벌어지는 기적임을 우리는 도덕적으로 되새겨봐야 할 것이다. 하나의 전문가가 되면서 다른 분야와 통섭하는 것은 살아 있는 정신의 자연스러운 생리다. 정통한다는 것은 철벽을 면벽으로 뚫는 지난한 과정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상아탑은 비인기 학문을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홀대하거나 퇴출시키고 학생들에게 한 가지 길에 전념하는 값진 태도를 가르치기도 전에 교수들의 안위와 놀이터를 위해 두세 가지를 한꺼번에 얇게 배우는 가짜의 기술을 권한다.

 게다가 그것을 가르치는 자들은 정작 그 학문의 긍정적 창조자도 아니다. 그들은 간판만 바꿔 단, 정작 자기들도 모르는 학과를 이끌어간다. 우리는 당연한 것들을 대단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통섭적 사고방식과 배움의 융합은 당연하고 대단하다. 그러나 이것이 어떤 빛 좋은 개살구가 될 때, 또한 빛 좋은 개살구의 세계가 번창하는 악성 토양이 될 때 학문의 실체와 진정성은 질식한다. 우리에게 본령이라는 것이 남아는 있는가? 본령이 유지돼야 새로운 상상이 가능하다.



이응준 1990년 계간 문학과 비평에 ‘깨달음은 갑자기 찾아온다’로 등단했다. 장편소설 『내 연애의 모든 것』 『국가의 사생활』과 시집 『애인』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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