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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현대 음악계의 이단아' 2일 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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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미국 작곡가 루 해리슨(사진)이 지난 2일 85세로 타계한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그가 우리 국악사(國樂史)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인물임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1960년대 초 한국을 두 차례 방문해 이혜구.황병기씨 등 국악인들과 교우를 나누었던 그는 우리의 전통음악, 특히 아악(雅樂)의 우수성에 탄복을 금치 못했던 음악인이었다.

창작 국악의 개념도 생소했던 당시에 오선지에 창작 국악관현악'새당악 무궁화'를 직접 작곡해 창작 국악에 활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61년 서울대 국악과 학생들이 초연한 이 작품은 유려하고 장쾌한 한국의 궁중음악을 현대화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62년 10월 14일자 국내 한 일간지엔'피리 배우러 왔다 가는 루 해리슨-형식 싫어하는 기인(奇人), 국악서 노다지 캐고 귀국, 46세의 채식가인 노총각'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미국 현대 음악계의 이단아'로 불렸던 그는 오리건주 포틀랜드 태생. 젊었을 때 샌프란시스코에서 무용수로 활약했으며 작곡가 존 케이지, 무용가 머스 커닝험과 절친한 사이였다.

1930년대 타악기만 등장하는 콘서트를 처음 시도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40년대 뉴욕으로 잠시 건너간 그는 뉴욕 헤럴드 트리뷴에 음악평을 기고하면서 보험회사 직원 출신의 무명 작곡가 찰스 아이브스를 '미국 음악의 아버지'로 격상시키기도 했다(케이지.커닝엄은 모두 동성애자였다).

또 60년대엔 일본.중국.인도네시아.인도를 방문, 아시아의 전통음악에 심취했다.

평생 넥타이를 맨 적이 없고 구두 대신 슬리퍼를 즐겨 신으면서 낙천주의자를 자처했던 그는 시집과 산문집을 냈고 반전.환경운동은 물론 동성애자의 권익보호를 위해 앞장섰다. 최근엔 캘리포니아 남부 사막에 밀짚으로 겨울 별장을 지어 살기도 했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lull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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