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한국 언론의 워싱턴 소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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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희
워싱턴 특파원

한국 언론의 워싱턴 특파원들은 요즘 사건기자로 변신했다. 워싱턴 메트로폴리탄 경찰청을 매일 기웃거린다. 윤 전 대변인 성추행 의혹사건이 불러올 파장을 취재하기 위해서다.

 그 워싱턴 경찰청에선 14일(현지시간) 한국 언론 때문에 두 차례 작은 소동(disturbance)이 일었다. 오전의 소동은 “연방 검찰의 지휘를 받아 수사하겠다”는 기사가 불러왔다. 경찰 간부들은 영문으로 번역된 기사(워싱턴 경찰청에는 한국계 인사가 여러 명 근무하고 있다)를 보고 “어떻게 이런 표현을 할 수 있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연방범죄가 아닌 한 워싱턴 경찰은 독자적인 수사권을 가진다. 기소장도 스스로 작성한다. 그 기소장에 대해 검찰의 동의만 받을 뿐이다. 검찰은 경찰이 작성한 기소장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기각하거나 기소 중지 결정만 내릴 수 있다. 경찰 수사에 간섭할 여지가 없는 셈이다. 사정이 이런데 한국형 경찰에 익숙한 한국 언론이 “검찰 지휘”라는 표현을 썼으니 워싱턴 경찰로선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다.

 오후의 소동은 일부 한국 언론이 대변인과의 전화 인터뷰로 “이번 사건을 중범죄 수준으로 수사하고 있다”고 보도해 벌어졌다. 폴 매캐프 대변인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펄쩍 뛰었다.

윤창중 전 대변인의 성추행 의혹 사건이 처음 신고 된 워싱턴DC 경찰청. [워싱턴=박승희 특파원]

 -윤 전 대변인 사건을 중범죄로 수사한다는 보도가 있다.

 “(깜짝 놀라며) 한국 언론과 수사 내용을 얘기한 일이 없다. 일부러 (나를)곤란하게 만들려는 것 아니냐.”

 - 그러면 어떻게 이런 기사가 나왔나.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하나. 나는 한국 언론 누구에게나 같은 얘기를 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 사건은 경범죄(misdemeanor)로 수사 중이다.”

 -나중에 혐의가 추가돼 중범죄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혐의가 추가될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한 경찰 동료는 매캐프가 펄쩍 뛰는 이유를 알려줬다. 워싱턴 경찰청에는 2001년 4월 만들어진 일반명령(general order)이 있다. 이 명령에는 ‘GO-SPT-204.1’로 불리는 미디어 규정이 담겨 있다. 일종의 언론 상대 규정이다. A4용지 9쪽에 달하는 이 규정집에는 ‘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까지 세세히 정해놓았다. 그 첫째가 ‘수사 중인 사안에 대해서는 절대로 발설할 수 없다’다. 비밀 엄수 조항이다. ‘함부로 예단하거나 추측해 말하지 말라’는 당부도 있다. 특히 "오프 더 레코드(기자에게 보도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언급하는 행위)를 삼가라”며 “당신이 ‘오프 더 레코드’라고 말하면 ‘익명의 경찰 관계자에 따르면’이라는 식으로 기사화된다는 걸 명심하라”는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여 있다.

 이 규정을 어길 경우 벌칙이 생각보다 무겁다. 한 차례 어기면 감봉 1개월이고, 두 차례 어기면 감봉 3개월, 세 차례 어기면 파면이다. 한 경찰 관계자는 “경찰학교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듣는 게 언론과의 관계”라며 “경찰이 하는 일이 언론을 통해 국민에 알려지고 언론을 통해 왜곡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윤 전 대변인 성추행 의혹 사건이 불거진 뒤 속보 경쟁에 내몰린 한국 언론의 사정을 이들이 알 리 없다. 하지만 자신들이 지금부터 진행할 수사에 대해 한국 언론이 앞서서 예단하고 결론 내버리는 상황에 대해서는 곤혹스럽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대통령 취임 후 첫 정상회담을 수행한 정부 고위 관계자가 나라 망신을 시키는 것도 모자라 이차적으로 벌어지는 언론의 비정상적 행태들을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부끄러운 단면들이다.  

박승희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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