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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도발 방관하다 ‘뮌헨의 교훈’ 남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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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호 24면

네빌 체임벌린 총리가 1938년 9월 30일 영국 런던 헤스턴 공항에서 환영 인파 앞에서 뮌헨협정 문건을 보여주고 있다. 체임벌린은 적의 도발 앞에서 평화를 애걸하면 오히려 비극을 초래한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남겼다. 이는 ‘뮌헨의 교훈’이라는 이름으로 냉전시대 국제정치의 바탕이 됐다. [위키피디아]

1937년부터 3년간 영국 총리를 지낸 네빌 체임벌린(1869~1940)의 리더십은 유화정책(appeasement)과 뮌헨협정(Munich Agreement)이라는 두 단어로 압축된다. 이 두 단어는 국제정치에서 실패한 정치 리더십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체임벌린은 성공이 아닌 실패의 리더십을 보여준다.

되살아난 강국, 영국의 리더십 ④ 네빌 체임벌린

1938년 9월 30일 독일 뮌헨에서 비행기를 타고 런던 서부 헤스턴 공항에 도착한 체임벌린 총리는 환영 인파 앞에서 협정문을 흔들어 보인 뒤 읽었다. 이날 체임벌린은 뮌헨에서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총통,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총리와 함께 뮌헨협정에 서명했다. 히틀러의 요구대로 주데텐란트(체코슬로바키아의 보헤미아를 둘러싸고 있는 독일계 주민 거주 지역)를 독일이 병합하는 데 동의한다는 내용이었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의 베르사유 조약으로 탄생한 신생국 체코슬로바키아는 이 협상에 초대받지도 못한 채 강대국들끼리 자국을 해체하는 걸 빤히 지켜봐야만 했다.

이날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관저로 돌아온 체임벌린은 이렇게 말했다. “영국 총리가 독일에서 명예로운 평화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나는 이것이 우리 시대의 평화라고 믿습니다.”
이 장면은 BBC방송을 통해 영국 전역에 중계됐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기억하고 있던 체임벌린은 두 번 다시 영국과 유럽을 전쟁으로 몰고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굴욕적인 양보와 신생국의 희생을 포함해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평화를 지키고 싶어했다. 그래서 “최후의 영토적 요구”라는 히틀러의 말을 굳게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을 것이다. 역사는 이를 유화정책이라고 부른다. 이에 앞서 1938년 3월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에서 금지한 오스트리아 병합을 강행했을 때도 체임벌린은 외교적 항의만 했을 뿐 행동을 전혀 취하지 않았다. ‘말만 할 뿐 행동이 따르지 않는 정책(only talk, no action)’은 영국의 군사 개입을 두려워하던 히틀러의 야욕만 키워주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영국에서 뮌헨협정의 인기는 상당했다. 국민 대다수는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켰다”고 생각해 체임벌린의 귀국을 열렬히 환영했다. 미 CBS방송의 에드워드 머로는 당시 이렇게 보도했다. “수천 인파가 총리 관저로 이어지는 화이트홀 대로에서 뮌헨에서 귀환하는 총리를 맞이하기 위해 도열했다. 몇몇 석간 신문은 그가 이번 공로로 총리 재임 중 기사 작위를 받는 영국 역사상 두 번째 인물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어떤 신문은 그가 노벨 평화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뮌헨협정 조인식에 참석한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총리,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총통,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정부수반과 갈레아초 치아노 외무장관.(왼쪽부터)

뮌헨협정으로 독일에 체코 일부 넘겨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했을 때 체임벌린이 아무런 대응 조치를 취하지 않자 이에 반발해 외무장관직을 사임한 앤서니 이든을 비롯한 몇몇 의원만 “영국이 불명예스럽게 행동했다”고 비난했을 뿐이다. 시종일관 강경 대응을 주장했던 윈스턴 처칠 의원은 “전체주의 정권에 대한 굴복과 물질 제공으로 평화를 지킬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이 총리가 지향하는 새로운 국제질서인가”라고 추궁했다.

당시 체임벌린은 개인비서에게 “히틀러가 만일 협정을 위반한다면 전 세계에 자신이 얼마나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된다. 그는 세계 여론이 등을 돌릴까 봐 차마 약속을 어기지는 못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위장된 평화’는 얼마 가지 못했다. 히틀러는 재빨리 주데텐란트를 차지한 데 이어 이듬해 3월 남은 체코슬로바키아 전역까지 점령해 협정문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었다. 히틀러는 세계 여론 때문에 협정을 깨지 못 할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냉혹한 침략자이자 독재자였다. 힘을 비축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상대방의 약점을 찾으며 평화를 원하는 척 연기했을 뿐이었다. 히틀러 집권 초기에 체임벌린이 억지력 행사를 포기하는 바람에 오히려 히틀러의 오판과 자만을 부르고 전쟁의 판을 키운 셈이 됐다. 결국 체임벌린은 발톱을 숨기고 말로만 평화를 떠들던 히틀러의 기만 전술에 처절하게 당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적과의 협상에서 힘을 보여줘야 할 때 평화 의지만 과시하다간 적에게 얕잡아 보인다는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심지어 영국민조차 실상을 제대로 몰랐다. 지식인 사회에선 강경론자 처칠보다 평화론자 체임벌린의 인기가 더 높았다. 히틀러가 뮌헨협정을 깨고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을 점령하자 국왕 조지 6세는 체임벌린에게 편지를 보내 “평화를 위한 용기 있는 행동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위로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오판 대가로 결국 자기 손으로 개전 선언
영국민과 국제사회는 제2차 세계대전의 엄청난 비극을 겪은 뒤에야 실상을 깨달았다. 체임벌린의 리더십 실패로 인해 얻어진 ‘뮌헨의 교훈(lesson of Munich)’은 전후 국제정치 용어가 됐다. 국제정치학자 스티브 첸은 “유화정책은 방어자의 싸우고자 하는 의지를 떨어뜨리며 공격자의 야욕을 더욱 키우게 된다”고 정리했다. 적의 도발을 반드시 분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지 않을 경우 도발이 오히려 격화된다는 교훈이다.

미·소 냉전시대에 서방세계는 이 교훈을 금과옥조로 삼았다. 1948년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자 서방진영이 신속하게 공동방어기구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를 결성해 대응한 것도 이런 경험 덕이다. 이후 소련은 약소국을 한 나라씩 야금야금 먹어가는 살라미 전술(salami technique)을 더 이상 써먹을 수 없게 됐다. 소련에 양보하거나 도발을 방관하다 ‘제2의 체임벌린’이란 비난을 받고 싶은 서방 정치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적대 국가에 둘러싸인 이스라엘도 이를 적극 활용한다. 적에게 유약하게 보이는 순간 자국 안보가 무너진다며 항상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체임벌린의 리더십 실패는 ‘국제정치엔 영원한 동맹도, 우방을 존중하는 책임 있는 강대국도 없다’는 생생한 교훈을 함께 남겼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프랑스의 동맹국이었으나 나치 독일에 의해 유린당할 때 군사적으로는 물론 외교적으로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 영국은 이 나라를 탄생시킨 베르사유 조약을 이끈 강대국이어서 도덕적 책임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체임벌린은 이를 헌신짝처럼 저버린 채 한 나라와 그 국민의 운명을 협정문 한 장과 맞바꿨다. 그래서 체코슬로바키아에선 뮌헨회담을 ‘뮌헨 배신(Munich betrayal)’이라고 부른다. 체임벌린은 뮌헨회담 직후 이 나라 지도자 에드바르트 베네시가 항의하자 싸늘하게 대답했다. “영국은 주데텐란트 건으로 전쟁을 하고 싶지는 않소.”

체임벌린이 이런 식으로까지 지키려 했던 유화정책의 대가는 엄청났다. 히틀러가 1939년 9월 폴란드를 침공해 제2차 세계대전의 불을 댕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치 독일은 서방세계가 절대 손잡을 수 없다고 믿었던 공산국가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폴란드를 동시에 침공해 영토를 나눠 가졌다. 체임벌린은 오판의 대가로 자기 손으로 개전 선언을 해야만 했다. 평화란 군사력과 함께 확고한 도발 대응 의지를 가져야 확보할 수 있는데 협상에만 매달리다 오히려 더 큰 불행을 자초했다는 평가를 들었다.

그럼에도 당시 체임벌린에 대한 지지율은 계속 높았다. 9월 개전 선언 당시 지지율 55%를 기록한 데 이어 그해 12월에는 68%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는 전쟁 시기에 국민의 단합심과 애국심,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준 것일 뿐이라는 지적이 많다. 상당수 하원의원은 그의 리더십으로는 전쟁을 치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전시내각을 구성하려 했지만 조각(組閣)조차 불가능했다. 야당인 노동당과 자유당은 ‘유화정책을 고집하다 전쟁을 막을 역사적인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며 체임벌린이 주도하는 전시내각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국민 뜻 따르지만 말고 이끌 줄 알아야
1940년 5월 보수당 소속 리오 에머리 의원은 하원 연설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전시 상황이 됐으므로 이제 과거의 평화체제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 토론 재능, 상황 파악 능력, 정책의 인기를 내다보는 통찰력, 타협 능력, 심사숙고는 평화 시기의 지도자에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품성이다. 하지만 이는 전시엔 치명적이다. 승리의 핵심은 비전·대담함·신속함, 그리고 결정의 지속성이다. 이젠 이런 덕목을 갖춘 인물을 전시 지도자로 삼아야 한다.” 에머리는 체임벌린의 한계를 지적하며 퇴진을 요구한 것이다.

체임벌린은 그 연설 직후 총리에서 물러났다. 후임 총리는 힘에 의한 강경정책을 주장했던 처칠이 맡아 대연정을 구성했다. 체임벌린은 대연정에 참여해 2인자인 추밀원 의장을 맡았다. 하지만 지나친 노심초사 때문이었던지 그해 10월 갑자기 암이 발병해 사임한 뒤 한 달 뒤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임종 직전 안간힘을 다해 이렇게 속삭였다. “사태가 좀 나아지면 병이 나을 텐데.”
그의 유약한 리더십 때문에 영국은 제2차 대전을 치르며 국력이 쇠잔해졌다. 세계의 주도권은 ‘신생 강국’ 미국으로 넘어갔다. 이후 영국은 더 이상 세계 정세를 주도할 수 없었다.

체임벌린은 잉글랜드 중부 버밍엄의 보수당 정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셉은 각료였으며 배 다른 형인 오스틴은 내각 2인자인 재무장관을 지냈다. 체임벌린은 젊었을 때 카리브해 연안의 식민지 바하마에서 농장을 운영하다 실패한 경험이 있다. 이후 영국 고향으로 돌아가 기업 경영에 전념했다. 그러다 1911년 버밍엄 시의원과 시장을 거쳐 1918년 하원의원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정계에선 승승장구했다. 우정총국장과 보건장관·재무장관을 지냈으며 1937년 5월 스탠리 볼드윈 총리가 건강 문제로 은퇴하자 뒤를 이었다.

그는 조용하고 신중한 스타일로 늘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고 대중의 뜻을 따르는 정치를 지향했다. 하지만 국민의 뜻을 따르기만 하고 이끌지 못 하다 보니 시대의 큰 흐름을 놓쳐 역사적 비극을 초래했다. 지도자 개인은 물론 역사와 국가·국민 모두에 비극이다.



글 싣는 순서

1 솔즈베리 경(보수당)
고립정책과 점진적 개혁 추진

2 허버트 애스퀴스(1908~16·자유당)
해군 증강과 복지정책 추진

3 데이비드 로이드조지(1916~22·자유당)
1차 대전 승리 이끌고 복지국가 틀 마련

4 네빌 체임벌린(1937~40·보수당)
협상 통해 전쟁 막으려다 실패

5 윈스턴 처칠(1940~45, 1951~55·보수당)
피와 땀과 눈물의 단결 리더십

6 클레멘트 애틀리(1945~51·노동당)
미국과 손잡은 중도좌파 실용주의

7 헤럴드 맥밀런(1957~63·보수당)
1차 대전에 참전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8 해럴드 윌슨(1964~70, 1974~76·노동당)
정적을 각료로 기용하고 경제 회생

9 마거릿 대처(1979~90·보수당)
영국 복지병 치유한 철의 리더십

10 토니 블레어(1997~2007·노동당)
‘쿨 브리태니아’로 창의 리더십 발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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