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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한은, 금리 최대한 내려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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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김성민
카이스트 경영대학 교수

30년 넘게 중앙은행에서 근무하다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가장 곤혹스러운 부분이 중앙은행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이는 금융위기 이후 주요 선진국 중앙은행들이 동원하고 있는 양적완화 등 비전통적 정책수단이 생소하다는 점뿐 아니라 교과서가 물가불안이나 금융불안 등 두 극단 상황에서 중앙은행의 역할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의 전통적 역할은 물가상승이 경제 불안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통화긴축을 통해 통화의 대내 및 대외 가치를 안정시키는 것이다. 또한 중앙은행은 금융위기가 발생했을 때 최종 대부자 역할을 수행하는데 미 연준이 최종 대부자 역할뿐만 아니라 최초의 유일한 대부자 역할까지 담당하면서 시장에서는 도저히 팔리지 않는 부실자산을 과감히 매입해 위기를 조기에 수습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두 극단의 중간인 위기 후 전개되는 경제 여건은 전대미문의 상황이기 때문에 중앙은행의 역할을 교과서에서 찾기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위기 이후 주요 중앙은행들의 역할은 어떻게 바뀌고 있나? 미 연준은 현재 실업률이 6.5% 이하로 하락할 때까지 매달 400억 달러까지의 모기지 담보증권 매입을 계속한다는 과감한 양적완화를, 일본은행도 디플레이션 타개를 위해 2% 물가상승률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매월 국민소득의 1% 규모 자산을 매입하는 연준보다 훨씬 강력한 양적완화를 수행하고 있다. 더욱이 위기 이후 주요 중앙은행들은 자국 통화의 대외가치 훼손을 방지하는 전통적인 역할에서 암묵적으로 대외가치를 하락시키려는 역할로 전환하고 있다. 일본의 신통화정책의 핵심은 인플레이션 유발, 실질금리 및 엔화가치 하락, 수출 증대, 투자 증대를 통한 경기부양에 있다. 물론 이러한 비전통적 수단의 효과에 대해 이론이나 경험으로 검증되지 않고 위험을 수반하지만 과감히 수행하는 것은 현 상황에서 최선의 방안 모색보다 최악의 상황을 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절박감이 반영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행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나? 한국 경제가 고용 없는 성장이 지속되는 가운데 가계부채의 부담 증가 및 인구고령화 등으로 경제의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문제점은 최근 주목을 받고 있는 맥킨지 보고서의 지적이 없더라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보다 심각한 것은 우리 경제가 일본과 같은 장기불황을 겪지 않을까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면서 모든 경제활동이 위축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불황 발생 초기의 일본은행의 어정쩡하고 미온적인 대응이 불황을 장기화시켰다는 점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한은이 과감하게 모든 정책수단을 동원해야 할 시점이다.

한국은행의 주요 정책수단으로는 크게 공개시장 조작을 통한 정책금리 조정과 중앙은행 대출이 있다. 한국은행은 정책금리를 최대한 인하할 수 있는 만큼 인하할 필요가 있다. 저금리가 장기간 지속되면 자산거품 발생 위험이 커지고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정책 조절 여력이 감소된다는 우려는 이해되지만 선제적 대응이 보다 효과적이고 정책금리가 ‘0’에 접근해도 중앙은행이 새로운 정책수단을 개발할 수 있다. 또한 상대적으로 높은 실질금리는 부채의 실질부담 증가 및 원화 강세를 유발할 수 있다. 이와 함께 한국은행은 금리 인하 효과가 자금이 필요하거나 고용 창출로 연결되는 부분에 파급될 수 있도록 중앙은행 대출기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 미 연준이 모기지 담보채권을 집중 매입해 모기지 금리 하락을 통해 주택시장의 회복과 소비자의 금리부담 경감을 도모하고 있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 연준이 국민으로부터 존경받는 이유가 보수성과 함께 상황 변화에 걸맞은 유연성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김 성 민 카이스트 경영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