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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송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눈이 온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진다. 이른 아침, 창문을 열 때의 그 감격은 형언할 수 없다. 어느 때 없이 조용한 아침. 시계를 의심하며 창변에 서면 {아, 눈이…}눈이 오는 것이다.
동짓달에 내리는 눈은 예부터 [약눈]이라고 했다. 노인들은 장독 위에 덮인 눈을 소중히 모아서 항아리에 담아 두었다. 그 눈이 녹은 물을 마시면 내내 감기를 앓지 않는다는 토속도 있었다. 춘삼월이면 그 물로 낟알을 씻어서 조기파종도 했다. 곡식이 실하고 벌레가 덤비지 않는다는 농가의 세습이다. 지금은 어느 시골에나 그런 풍습이 남아있을지.
한반도에도 눈이 덮여 있는 날이 거의 두달이 넘는 곳이 두군데나 있다. 강원도 해변을 따라 태백산 줄기와 중강진의 백두산 줄기에는 평균 75일간이나 눈이 싸여 있다. 강설 선은 차차 서진, 서해안에 이르면 눈이 쌓여 있는 날수는 20일도 넘기지 못한다.
서울은 북악산에서나 눈을 볼지, 그리고는 질퍽한, 금속 빛의 기름이 번지는 흑설을 보게된다. 정원에 내리는 눈은 저마다 높다란 철조망에 갇혀 있다. 그나마 서민에게는 마음속에나 눈이 내릴지, 적설을 볼만한 여유가 없다.
최근엔 지구상의 강설 한계선에 이상이 생겨 곳곳에서 환성을 듣게된다.
북위30도 이남에서는 산정의 설모는 볼 수 있어도 평지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60년대에 들어서 아열대지방에도 눈이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 핵운의 장난이나 아닐지 모른다.
폭설이 아니면 눈이 와서 나쁠 것이 없다. 눈이 오는 날 살벌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다. 눈은 [노이로제]를 가라앉힌다는 심리적인 현상도 있다.
{헤르만·헤세}의 소설 [크눌프]는 눈이 오는 산길에서 끝이 난다. {그럼, 이젠 더 탄식할 것이 없는가?} 신의 묻는 음성이 어디서 들렸다. {이젠 아무 것도 없읍니다.} [크눌프]는 부끄러운 듯이 웃는다.
눈이 오는 날은 모두가 풍성하고 안온하다. 이런 날은 빚장이도 찾아오지 않을 것 같다.
{눈이 녹으면 남는 발자국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작고 윤동주 시인은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일년 열두달 하냥 내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다} 눈오는 날의 마음을 정말 일년 열두달 간직할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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