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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엔 형제의 영화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중앙일보

입력

우리는 잠시 착각을 하게 된다. 이거, 흑백영화네? 요즘 영화처럼 신나고 왁자지껄한 재미는 없네? 영화공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를 보면서 필름누아르 장르에 대해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명암의 대비가 강조되고, 이상한 상황이 전개되면서 주인공은 길을 잃는다. 그런데 이 영화를 전형적인 필름누아르라고 보면 곤란하다. UFO가 등장하고 기괴한 음모론이 펼쳐지는 등 황당무계한 구석이 있기 때문. ‘그남자는 거기 없었다’는 잘 빠진 장르영화는 아니고 대신, 코엔 형제의 영화다.

코엔 형제는 ‘파고’와 ‘바톤 핑크’ 등으로 이미 칸영화제 수상 경력이 있는 인물들. 미국 인디영화의 대명사처럼 평가되는 이들은 다양한 장르영화를 독창적으로 변주하면서 작품활동을 이어왔다. 관객이 이미 익숙한 장르의 관습을 끌어오되, 철저하게 그 재미들을 비틀고 변주하면서 새로운 쾌감을 주는 것이다. ‘분노의 저격자’와 ‘아리조나 유괴사건’ 그리고 ‘파고’ 등 코엔 형제의 영화는 언제나 재기넘치고 지적인 유머를 담고 있다.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는 그들이 만든 최근작이며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영화를 만든 이들은 이것이 제임스 M 케인의 세계를 모방한 것이라 밝힌다. 평범한 사람이 유혹에 빠져 어둡고 이상한 길로 걸어들어가는 것은 케인의 작품을 쏙 닮았다. 이발사 에드의 생활은 무료하다. 아내 도리스와의 평범한 일상에서 그는 평범한 이발사로 살아가고 있다. 에드는 우연히 도리스의 외도를 눈치채는데 상대는 그녀의 직장 보스다. 에드는 협박편지를 보내 돈을 받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겠노라고 결심한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살인을 하게 되고, 상황은 예측불허의 상태로 흘러간다. 막상 살인범으로는 아내 도리스가 체포되고, 에드를 둘러싸고 엉뚱한 음모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영화는 미국인들이 자기 힘으로 어쩔수 없는 상황에 빠지는 얘기다. 여기서 범죄는 전혀 의도되지 않았지만 주인공은 그것에 빠져들게 된다” 코엔 형제의 얘기처럼,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는 다소 관습적인 장르의 룰을 제시한다. 앞으로 죽음을 맞게 될 남자의 시점에서 이야기는 진행되고 있으며 1940년대, 50년대 미국의 고전영화를 연상케하는 대목도 여럿 있다. 유부녀의 불륜, 예기치 않은 살인, 법정공방 등으로 이어지면서 영화는 평범한 범죄영화로서 첫발을 딛는다. 그런데 이야기는 조금씩 엉뚱한 방향으로 흐른다. 살인에 연관된 어느 부인은 주인공에게 UFO에 대한 비밀을 들려주고, 에드는 죽은 아내와 소통하기 위해 심령술사를 찾는다.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는 어느 수동적이고 나태한 소시민의 이야기다. 그는 별다른 계획없이 결혼했고, 이발사라는 직업에 대해 불만이 있고, 이웃에 사는 어린 아가씨에게 은근히 호감을 품는다. 영화는 이 소시민이 겪는 비유적인 실패담이자 범죄의 기록이다. 여기에 초자연적 현상, 그리고 우연의 모티브들이 중첩되면서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는 미국 사회의 정신적 공허감에 대한 흥미로운 보고서 역할을 한다. “기회란건, 아주 드물게 오는 법이야” 주인공의 뇌까림처럼 영화는 아메리칸 드림의 종말, 그것의 대체물로서 초자연적 환상과 음모론에 대해 언급한다. 그건, 영화를 통해 미국적 신화에 대한 조롱과 경멸감을 은연중에 드러내곤 했던 코엔 형제의 스타일이기도 하다.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는 배우들 연기도 좋다. 빌리 밥 손튼, 프랜시스 맥도먼드, 제임스 갠돌피니 등의 배우들이 출연하고 있다. 특히 영화 내내 줄담배를 피우고 있는 빌리 밥 손튼은 에드 역을 연기하면서 느린 톤의 목소리로 나레이션을 들려준다. 이 남자는 거리를 걸어가면서 담배를 피우고, 차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일하면서 담배를 피운다. 무엇 때문에? 그에겐 담배 연기가 자신의 ‘실존’을 증명하기 위한 몸부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영화를 보면 느낄수 있듯, 그는 거기에 없다. 살아서 움직이고 있지만 어느 순간엔가 이미 정신은 죽어버린 산송장이 되어버렸으니까.

김의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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