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세상이라는 거인에 맞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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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최근 만난 몇 명의 학부모에게 물었다. “요즘 중·고등학생들 사이에선 뭐가 화제인가요?” 대부분은 당황했지만 두 명은 같은 답을 내놨다.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인가 때문에 학교가 난리라던데.” 종종 들르는 만화전문서점 주인도 말했다. “요샌 『진격의 거인』이 제일 잘나가요. 10대나 20대가 많이 찾더라고.”

 그래서 읽었다. ‘굉장한 작품’이라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지만 내 취향은 아닐 것 같아 망설였던 만화 『진격의 거인』(학산문화사에서 9권까지 발행)이다. 일본 만화가 이사야마 하지메의 데뷔작으로 일본에서만 누적 발행부수 1200만 부 돌파, 제35회 고단샤 만화상 등을 수상한 작품이다. 새삼 화제가 된 건 지난달 일본 방송사 MBS에서 애니메이션 방영을 시작했기 때문. 이 소식이 한국 팬들에게도 전해지면서 ‘진격의 거인’은 한때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고, 국내 케이블 채널과 인터넷 TV에서도 방송되기 시작했다.

만화 『진격의 거인』의 한 장면. [사진 학산문화사]

 내용은 이렇다. 인간을 먹어치우는 거인이 출몰해 인류는 절멸의 위기를 겪는다, 살아남은 인간들은 50m의 성벽을 겹겹이 쌓고 그 안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100년 후 벽을 능가하는 초대형 거인들이 다시 나타나 인간을 공격한다. 거인에게 어머니를 잃은 주인공 소년 앨런과 친구들은 군대에 들어가 거인과 맞서 싸운다.

거인이 활개치는 세상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 친절할 정도로 이해하기 쉬운 이 세계”에 대한 은유다. 그리고 작가는 이 절망적인 상황에 안주할 것인가, 맞서 싸울 것인가를 묻는다. 만화에는 이런 대사가 자주 등장한다. “싸우지 않으면 이길 수도 없어”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거야” 등. 세상이라는 거인에 힘껏 부딪쳐보라는 직설적인 메시지다. 그러나 이런 메시지 외에도 요즘 젊은 세대에게 어필하는 다양한 매력이 이 만화에는 있다. 성을 하나씩 함락시키는 적과 다양한 무기로 이에 맞서는 인간은 온라인 게임의 구도와 유사하다. 인터넷 게시판 등에선 거인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등 미스터리한 설정에 대해 치열한 논의가 오간다.

 그러니 요즘 아이들의 취향이 궁금한 부모님이라면 이 만화를 한번 읽어보시길(참고로 만화책은 ‘15세 이상’이지만 애니메이션은 ‘19세 이상 시청가’ 등급). “이렇게 잔인한 만화를 보고 있다는 말이야?” 하고 놀랄지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은 말한다. “용기 있는 주인공의 모습에 가슴이 뛰었다” “이 만화를 읽고 도전한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