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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으로 변신한 초콜릿 … 맛에서 멋을 찾는 사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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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면

스페인 셰프 파코 토레블랑카(62)가 드레스를 초콜릿으로 장식하고 있다.

“단순히 맛있는 음식만 먹는 행사가 아니다.”

싱가포르 센토사 섬, ‘2013 세계 미식가 축제’(World Gourmet SummitㆍWGSㆍ4월 16~26일)에서 만난 호주 셰프 매트 모란(43)은 축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호주 시드니와 브리즈번에서 식당 ‘아리아’를 운영 중인 모란은 호주 최고의 셰프로 손꼽힌다. 호주의 미슐랭 가이드 격인 ‘디에이지 굿 푸드 가이드’로부터는 최고 평점인 모자 세 개를 획득했다. 식당 일이 대성공하면서 아버지가 사업 실패로 잃었던 농장도 되찾아줬다고 한다.

셰프로 이미 성공한 모란에게도 WGS는 학교나 마찬가지다. 세계 각국의 정상급 셰프들이 축제 기간 싱가포르로 총집결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미슐랭 가이드로부터 별 세 개를 받은 프랑스의 야닉 알레노를 비롯, 20명이 넘는 정상급 셰프들이 왔다. 모란은 “처음 참가했는데 많은 영감을 얻었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최신 트렌드의 집결지인 만큼 내년에도 꼭 초청받고 싶다”고 말했다.

올해로 17회째를 맞은 2013 WGS의 테마는 ‘장인&다이닝의 예술(Artisans & The Art Of Dining)’. 요리의 장인뿐만 아니라 도자기, 칵테일, 칼 등 주방과 관련된 장인들이 한꺼번에 모였다. 축제 기간 싱가포르는 상상력과 아이디어로 들썩였다. ‘맛’은 기본이다. 식도락의 첨단 싱가포르에서 2013년 세계 미식가들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19일 열린 초콜릿 패션쇼에서 모델이 초콜릿으로 장식된 옷과 모자를 걸치고 서 있다.

더 재밌게 더 즐겁게 … 아이디어 용광로

19일 저녁 센토사 섬의 W호텔. 여느 패션쇼와 달라 보이지 않았지만 현장에는 진한 초콜릿 향이 은은하게 배어 있었다. 이날 모델들이 입은 옷이 초콜릿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날 열린 초콜릿 패션쇼는 2013 WGS의 하이라이트. 초콜릿 장인 파코 토레블랑카(62)가 마스터 셰프로 참가했다. 2006년 미식가 아카데미 대상을, 2004년 스페인 최고 제빵사로 선정됐다.

모델이 입은 원피스를 보고 ‘이게 먹는 초콜릿 맞느냐’고 한 관객이 질문하자 토레블랑카는 "초콜릿이 맞다”고 답했다. 옷 모양의 거푸집을 만들고 그 틀에 초콜릿 액을 넣은 다음 식혀서 굳혔다고 한다. 쇼 직전 쿨링 스프레이로 초콜릿을 얼린 옷을 모델들이 입을 수 있는 시간은 단 5분. 모자는 20분 동안 쓸 수 있다. 혹시 있을 사고(?)에 대비해 셰프들이 직접 입고 실험까지 했다고 한다. 체온, 패션쇼장의 온도까지 주도면밀하게 적용해뽑아낸 제한 시간이다. 튀는 아이디어는 초콜릿 패션쇼만이 아니다. 패션쇼의 호스팅 셰프 제니스 웡은 요즘 싱가포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셰프다. WGS도 그를 ‘상상력의 보고’라고 소개했다. 그의 가게 ‘2AM 디저트바’는 일부 벽과 천장을 아예 먹을거리로 도배했다. 벽에는 초콜릿을, 천장에는 마시멜로를 발랐다. 웡은 "음식을 꼭 접시에 담아서 먹어야 된다는 법이 어디 있냐. ”고 반문했다.

1, 2, 3 미식가 잼 세션과 셰프들의 갈라 디너에서 선보인 음식들. 왼쪽부터 초콜릿으로 만든 디저트, 초콜릿에 살짝 찐 새우를 얹어 만든 전채요리, 양고기 스테이크.

2013년의 테마는 장인정신

"고기냐 아니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af or not to beaf).”

19일 열린 미식가 잼 세션. 다 큰 어른 몸통만 한 고기를 통째로 들고 다리오 세치니가 들어왔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약간 놀란 표정이었지만, 햄릿의 한 구절,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를 패러디한 그의 농담에 객석은 웃음바다가 됐다. 이내 그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그는 셰프가 아니지만 WGS에 초청받았다. 고기를 써는 기술에 있어서는 세계적인 장인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써는 기술에 따라 맛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에 그가 썬 고기만 공급받는 셰프들도 있다. 세치니는 “ 먹기 위한 목적으로만 도축한다. 버리는 부분 없이 머리부터 꼬리까지 남김없이 잘 해체해야 맛도 더 좋다”고 말했다.

도자기 장인도 합세했다. 싱가포르 출신 유명 도예가 테이 수 청은 21일 오후 타마린드 힐에서 열린 칵테일 디너에서 자신의 작품을 직접 전시했다. 예술 전시회와 함께 세계적인 셰프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기회다. 호주와 포르투갈 등의 유명 와인제조업체도 자신들의 와인을 소개하기 위해 싱가포르까지 직접 와인을 싣고 왔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 근거를 둔 명품 주방용 칼 제조업체 ‘블레이즈 오브 더 가즈’도 WGS에 초청됐다. 탄소강 스테인리스 심에 연철을 입혀 강성과 유연성을 동시에 잡았다고 한다. 셰프들 역시 칼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이 회사 매니저인 토머스 샘슨은 "세계적인 셰프뿐만 아니라 구매력 있는 사람들이 많이 찾기 때문에 회사 돈을 들여서라도 올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패션쇼 직전 초콜릿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는 모델. 초콜릿이 녹는 ‘사고’ 우려로 런어웨이 쇼에 설 수 있는 시간은 단 5분이다.  

요즘 인기 재료는 쇠고기 볼살

아이디어와 장인정신이 아무리 빛나도 요리가 맛이 없다면 헛것이다. 축제를 주관하는 싱가포르 관광청과 피터크닙홀딩스가 축제의 최우선 가치를 ‘맛’에 둔 건 이 때문이다. 축제 프로그램이 해마다 바뀌지만, 맛있는 음식을 맛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데 중점을 뒀다.

메인 요리인 스테이크로는 양고기가 가장 인기였다. 양고기 특유의 냄새를 잡기는 어렵지만 요리만 잘하면 가장 연하고 맛있는 고기가 양고기라고 셰프들은 입을 모았다. 독일 출신 미슐랭 스타 셰프 요아힘 코어퍼는 "양고기는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을 내는 식재료”라며 "수준 높은 셰프들은 양고기를 어떻게 요리할지 항상 고민한다. 당연히 셰프들이 가장 좋아하는 고기도 잘 요리된 양고기 스테이크”라고 말했다.

최근 싱가포르에서 인기가 좋다는 식재료, 쇠고기 볼살로 만든 스테이크도 호평을 받았다. 연하기도 하지만 소 한 마리를 잡아도 얼마 되지 않는 부위라는 희귀성 때문인 듯도 했다. 이처럼 귀한 식재료를 쓰는 것에 더해 요리의 국적이 점점 희미해지는 트렌드도 이번 축제에서 확인했다. 호주 셰프 매트 모란은 "날생선을 먹지 않던 유럽에서 익히지 않은 생선을 사용한 전채요리가 유행하고 있는 게 대표적인 예”라고 했다.

글= 한영익 기자
사진= 싱가포르 관광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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