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차의 온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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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수은주가 1백을 치닫는 복중의 어느 날. 소매 없는 「러닝」에 얇은 남방을 걸치고 도 흐르는 땀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 골목 저 골목 죄 없는 대문을 두드리면서 백여 원씩을 뜯어(?)가는 수금원의 비애를 삼키며 한 독자의 문을 두드렸다.
달이 바뀔 때마다 불청객(?)인 나를 알아보겠다는 듯 나온 여인은 잠깐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들어갔다.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고 있을 때다. 한 손엔 돈을, 다른 한 손엔 큼직한 유리 「컵」에 얼음이 담긴 냉차 잔을 받쳐들고 나왔다. 『더운데 수고하시는군요. 드시고 가시죠』 뜻하지 않았던 호의에 말없이 멈칫하다 그대로 받아 단숨에 마셔버렸다. 『감사합니다』 나의 말이 내 귀에 이상하게 들려왔다. 나는 좀 더 적합한 고마운 표현을 못한 채 돌아섰다.
○…속치마 바람으로 아무렇게나 누워서 낮잠이나 군것질로 시간을 메우다가 거지가 동냥이나 온 듯 귀찮은 듯이 『다음에 오시오』하는 매몰찬 목소리. 그 오만한 목소리와 냉차 「컵」이 자꾸만 뒤섞여 눈에 어른거린다. 냉차 한「컵」에 담긴 흐뭇한 온정이 폭염에 일그러진 내 가슴속에 시원하게 물결져 갔다.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음 골목을 접어든다. <이운학·28·중앙일보 신당보급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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