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재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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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몇년 전 {나는 살고 싶다}라는 미국의 영화가 상영되었다. 폭력배와 가까이 지내던 한 창녀가 살인의 누명을 벗으려 몸부림치다가 끝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가는 줄거리였다. 실제로 있었던 일을 그린 이 영화는 당시 심각한 파문을 던졌던 것 같다. 증거가 없는데 폭력배들은 일제히 이 여인의 범행을 증언한다. 선의의 협력자를 가장한 형사가 감언이설로 꾀어 범행을 자인하도록 옭아들인다. 「센세이션」만 노리는 신문들은 악의에 찬 기사를 대서특필. 선량한(?) 시민들은 살인귀를 처형하라고 아우성이다. 한낱 갈대를 꺾으려고 온세상이 중무장을 하고 나선 것이다. 그녀는 기어이 「개스」실로 향해 걸어간다.
보기 흉하게 맨발로 죽을 수는 없다고 구두를 신고 죽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장면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녀가 범행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물론 없다. 문제는 범행한 증거가 뚜렷하지 않은데도 모두가 합심해서 그녀를 살해했다는데 있다.
「알베르·카뮈」는 이 영화의 첫머리에서 말했다. {후세의 사람은 이 사건을 마치 우리가 중세의 종교재판을 야만하고 잔악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이 생각하게 될 것이다.}
최근에 일어난 살인사건의 혐의로 구속된 신씨의 경우 개운치 않은 점이 많다. 그의 얼굴이 퉁퉁 부었고 손가락 발가락이 마디마다 멍들고 부었다는데, 이것은 혹독한 고문의 흔적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의 자백녹음도 미리 작성된 원고를 읽은 것이 아닌가하는 의혹을 여러 가지 점에서 낳고있다.
그의 범행여부와 아무 관계없이 이것은 중대한 문제다. 고문이 법의 묵인 하에 자행되는 것은 야만이다. 고문으로 범인을 색출하고 형벌을 가중해서 사고를 막으려해도 성과를 기대될 수 없다.
형벌의 힘이 대단치 않은 건 역사가 증명한다. 그보다 인간의 존엄성을 무겁게 다루는 사회의 규범이야말로 중요하다. 이것이 다름 아닌 문화일 것이다. 야만적인 종교재판은 없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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