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래' 돈주는 것도 통치행위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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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30일 현대상선의 대북 비밀 송금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했다.

金대통령은 박선숙(朴仙淑)대변인을 통해 밝힌 것은 두가지다. 먼저 송금의 성격이다. 金대통령은 "개성공단 개발사업을 비롯한 현대의 철도.통신.관광 등 7개 사업은 민간경협 사업이기는 하나 남북 협력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돼온 것"이라며 '경협 자금'으로 규정한 것이다.

또 하나는 이 지원이 '통치 차원'에서 이뤄졌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그는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키고 장차의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는 남북관계의 특수한 처지는 통치권자인 제게 수많은 어려운 결단을 요구했다"고 했다.

이 자금의 집행 과정에 관련돼 있음을 사실상 시인한 셈이다. 또 이 돈이 '평화 자금'내지는 '전쟁 방지자금'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金대통령은 지난해 이 의혹이 제기된 이후 침묵으로 일관해 왔으며, 청와대측은 "청와대와는 무관한, 현대의 일"이라는 입장을 취해왔다.

金대통령이 이날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것은 감사원 발표 이후 자신에게 의혹이 집중되리라고 예상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나는 우리 국민과 민족 전체의 이익을 최상의 기준으로 삼아왔다"고 강조한 것도 통치권 차원의 불가피한 일이었음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金대통령이 논란에서 빠져나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우선 그가 대북 송금을 결과적으로 승인했다기보다는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개입했고, 지시했을 것이라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번에 문제가 된 2천2백35억원이 북한으로 흘러간 시점이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직전이다. 정부의 핵심 인사들이 직.간접으로 관련돼 단순한 경협 자금이라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다.

당시 金대통령 일행의 방북은 6월 12일 이뤄질 예정이었으나 북한 측의 사정으로 돌연히 하루가 연기됐다. 한나라당은 "국정원은 북한이 지정한 해외 계좌로 송금하려 했으나 계좌번호가 달라 지연되는 바람에 정상회담이 하루 늦어진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이때 문화부장관으로 있던 박지원(朴智元) 청와대 비서실장의 행적도 의혹의 대상이다. 한나라당은 "朴전 장관이 2000년 3, 4월 싱가포르.상하이(上海).홍콩 등을 방문했으며 북한의 송호경 아태평화위 부위원장과 대북 송금 시나리오를 짰다"고 주장했다.

정상회담 당시 국정원장이었던 임동원(林東源) 청와대 외교안보통일특보에 대해서도 의혹이 제기된 상태다. 엄낙용(嚴洛鎔)전 산업은행 총재는 지난해 9월 "2000년 8, 9월 林원장을 만나려다 안돼서 김보현(金保鉉) 국정원 3차장을 만나 (대출금 회수대책을) 상의했는데 金차장도 '걱정말라'고 말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결국 金대통령의 선긋기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된 지원금이 남북정상회담 성사용이며, 金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이뤄졌을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비록 金대통령이 "사법심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했지만 한나라당에 의한 송금 은폐 의혹 추궁은 계속될 전망이다.

몰래 북한에 거액을 주고, 의혹이 제기된 뒤에도 잡아떼더니 이제와서 이해해 달라는 게 말이 되느냐는 지적이다.

이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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